크레타 섬은 그리스의 남쪽 바다에 떠있으며 


에게해의 남단부 중앙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리스의 섬 중에는 인구가 가장 많은 섬이며, 지중해에서는 크기가 다섯 번째로 큰 섬입니다.


그리스 문명의 시발점이자 유럽에서 처음 나타난 문명인 미노스 문명의 발상지로,


그 역사가 기원전 20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매우 장엄하고 거대한 역사의 중심지입니다.



크레타 섬의 역사



출처 : wikipedia



시기 

 사건

 기원전 3000년경

 미노스 문명 발상

 기원전 18세기

 크노소스 왕권 크레타 섬 통일

 기원전 17세기

 크노소스 궁전 건축

 기원전 15세기

 크노소스 궁전 파괴, 미노스 문명 멸망

 기원전 66년 

 로마의 속주로 전락

 9세기 - 10세기

 이슬람 세력에 의해 점령 당함

 13세기 

 베네치아에 귀속당함

 17세기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통치 당함

 18세기

 그리스령으로 복귀 

 20세기

 영국의 고고학자 에번스가 크노소스 유적 발굴

 




미노스 문명



출처 : wikimedia



미노스 문명은 그리스 최초의 문명이자 유럽 최초의 문명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노스 문명의 가장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크노소스 궁전을 꼽을 수 있으며,


원시 크레타 상형문자 역시 대표적인 유적 중 하나입니다.



특히 고고학자 에번스가 발견한 대량의 점토판에 쓰여진 선형 A문자는 아직까지도 해독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성의 사회 참여도가 높았던 문명으로 확인이 되고 있으며, 소와 뱀의 여신을 숭배하였다고 합니다.


이집트 문명과 레반트 지역과의 활발한 교류가 있었으며, 기원전 15세기 미케네 문명에 의해 멸망했습니다.



약 1만여 년 전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에 존재했던 전설의 대륙 아틀란티스의 일부분이라고도 하며,


지진과 해일로 인해 바다속으로 가라앉은 아틀란티스의 수수께기를 풀기 위해 연구를 지속하고 있습니다. 


찬란한 문화를 이룩하던 미노스 문명은 미케네 문명에 의해 멸망되었지만,


갑자기 쇠퇴한 미노스 문명은 산토리니의 화산 폭발이 멸망의 가장 큰 원인으로 보는 학자들도 많습니다.



크노소스 궁전



출처 : wikimedia



크노소스 궁전은 대부분 4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두 개의 층은 지하에 묻혀 있습니다.


기원전 30세기부터 서서히 번영을 맞이한 크레타 섬은 기원전 18세기에서 15세기까지 황금기를 맞이합니다.


이 황금기 시기의 통치자의 이름이 미노스였으며, 그로 인해 미노스 왕조, 미노스 문명이라 칭하고 있습니다. 


미노스 왕궁의 소재지가 크노소스이기 때문에 궁전을 크노소스 궁전이라 부릅니다.



크노소스의 궁전은 지금도 수 많은 건축학자들이 찾고 있습니다.


크노소스 궁전의 수도관은 굵기가 서로 다른 도자기로 만들었는데,


배수 체계가 매우 과학적며 현재 스위스에서 신청한 설계 특허품과 별반 차이가 없을 정도라고 합니다.


크노소스 궁전의 개인 욕조의 경우도 현재의 욕조와 비교하여 손색이 없을 정도입니다.


욕조에는 우유를 사용한 흔적이 발견되었으며 화장실의 창문과 통풍구 역시 건축학자들을 놀라게 합니다.



왕과 왕비의 처소는 거실을 마주보고 있게 설계되었으며 거실에서 각기 다른 계단을 통해 침실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독립된 욕실이 있었으며 욕실에는 화장을 할 수 있는 공간도 따로 마련이 되어 있습니다.



미노스 문명은 미케네 문명과 아테네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크레타 섬의 미노스 문명은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교류의 구심점이었습니다.



미노스 궁전 전설



전설에 의하면 미노스 궁전(크노소스 궁전)에는 반인반우의 괴물이 살고 있었으며,


아테네 사람들은 매년 젊은 남녀 7쌍을 괴물에게 바치고 있었습니다.


테세우스라는 젊은 청년이 괴물을 물리치기 위해 크레타섬으로 들어갔으며,


괴물을 물리치지만 미노스 궁의 미궁에 갇히게 됩니다.



테세우스를 사랑한 괴물의 딸이 탈출을 돕게 되고 공주는 죽게 됩니다.


청년은 배의 흰 돛을 검은 돛으로 교체하여 공주의 죽음을 애도하지만,


테세우스의 부친인 아이게우스는 검은 돛을 보고 아들이 괴물에게 죽임을 당했다고 생각하여 바다에 몸을 던집니다.



에게 해란 이름은 아버지의 슬픔을 담고 있습니다.




30년 전쟁 최대의 격전 뤼첸 전투가 후반기로 들어섭니다.



구교의 명장 파펜하임이 스웨덴 머스킷병에 의해 사망하게 되고,


신교의 스웨덴 황제 구스타프 역시 황제군의 기병에 의해 전사하게 되며


뤼첸 전투는 그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게 됩니다.


▶ 뤼첸 전투의 시작 알아보기



뤼첸 전투 후반기



출처 : wikipedia



구스타프의 죽음은 스웨덴 군의 사기를 일시적으로 떨어뜨리게 됩니다.


중앙의 스웨덴 군은 황제군의 포병에 밀리며 전멸의 위기에 처하지만,


스웨덴 중앙군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황제군을 향해 돌진합니다.



스웨덴군의 좌익에서 고전 중이던 작센군과 베른하르트 역시 끈질기게 황제군에 저항하며,


황제군의 공격을 7차례 막아내는 선전을 펼칩니다.


구스타프의 죽음으로 지휘권을 잡은 베른하르트는 병사들을 독려하고 사기를 끌어올리며,


전장에서의 죽음을 각오한 채 황제군을 향해 전 병력을 이끌고 돌진합니다.


또한 스웨덴군의 예비대 사령관 크니프하우제가 적절한 타이밍에 예비대를 합류시킴으로,


불리했던 스웨덴 군의 전세가 역전되어 황제군을 밀어붙이기 시작합니다.



뤼첸 전투로 인해 황제군의 주요 지휘관 대부분이 전사하게 되고


발렌슈타인은 부상을 당한채 도망갔으며 황제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30년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 뤼첸 전투는 신교 스웨덴 군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됩니다.





30년 전쟁 마무리



구스타프의 죽음으로 스웨덴의 황제와 신교의 지휘관의 자리가 공석이 됩니다.


구스타프의 딸 크리스티나가 스웨덴의 국왕에 오르게 되고 구스타프의 부하인 호른과 베른하르트가 지휘관이 됩니다.


전쟁으로 인해 재정이 약해진 스웨덴은 신교 지원을 위한 전쟁 자금을 끊어버리게 되고, 


스웨덴을 지원했던 프랑스 역시 구스타프의 죽음으로 지원을 중단하게 됩니다.



구교는 스페인이 2만의 병력을 파병하면서 전세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구교와 신교는 뇌르틀링겐에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구스타프가 없는 신교의 군대는 각개격파를 당하며 구교 스페인군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게 됩니다.


스페인군의 목표는 네덜란드였으며 네덜란드로 가는 길의 신교 세력권을 구교로 반환시킵니다.



1635년 독일의 남부 대부분은 구교가 점령하게 됩니다.



프랑스의 개입과 베스트팔렌 조약



출처 : Wikipedia



1635년 구교와 신교의 30년 전쟁 막바지에 프랑스가 개입하게 됩니다.


프랑스의 개입은 스페인을 다시금 전쟁에 끌어들이는 계기가 됩니다.



스페인의 개입으로 구교가 다시금 힘을 얻었지만, 스웨덴의 남은 군대가 2차 브라이턴펠트 전투에서 구교를 궤멸시키고,


프랑스 군대가 스페인 군대를 네덜란드 영지에서 완전히 축출시키며 스페인은 본토로 쫓겨나게 됩니다.



페르디난트 2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 3세는 휴전에 동의하고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게 됩니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은 분리, 독립하게 되었으며 지역별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게 됩니다.




신교의 구스타프는 구교의 발렌슈타인을 향해 돌진합니다.



스웨덴의 구스타프가 30년 전쟁에 참여하면서,


신교는 브라이턴펠트 전투 레흐강 전투에서 승리를 쟁취하며 구교를 압박하게 됩니다.


구스타프와 발렌슈타인은 뤼첸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며,


30년 전쟁 사상 가장 중요하며 가장 치열했던 격전의 전투 뤼첸 전투가 벌어집니다.


▶ 레흐강 전투 확인하기

▶ 브라이턴펠트 전투 확인하기

▶ 스웨덴 환율, 화폐 확인하기



뤼첸 전투



출처 : wikipedia



계절이 겨울로 접어들게 되어 작은 마을인 뤼첸에 숙영지를 꾸리던 발렌슈타인은


파펜하임이 보급품 확보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구스타프가 뤼첸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오전 7시 스웨덴군은 발렌슈타인의 황제군을 향해 진격하고, 오전 9시 양측의 군대는 서로를 확인하게 됩니다.


오전 10시 양 측은 서로를 향해 포를 발사하며 견제를 하다가, 오전 11시 구스타프가 기병을 이끌고 돌진합니다.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진을 친 발렌슈타인은 대포 약 20문을 설치하고 방어진을 꾸렸으며,


스웨덴 군은 황제군을 공격하기 위해 2개의 도랑을 건너야 하는 불리한 위치에서 공격을 전개해야 했습니다.



스웨덴 군은 도랑을 건너기 위해 포병을 도랑앞에 배치하여 황제군의 머스킷병을 공격합니다.


황제군 역시 포 공격으로 스웨덴군을 저지했으며 양쪽의 피해가 늘어갑니다.


스웨덴 군은 도랑 건너의 황제군 포병을 제압하고,


또한 우익의 구스타프의 기병이 발렌슈타인의 좌익을 공격하며 황제군의 중앙군을 위협하게 됩니다.



열세에 놓인 발렌슈타인은 포병대와 기병대를 활용하여 방어에 열중했으며,


파펜하임과 크로아티아 기병이 다시 전선에 합류를 하게 되며 사기가 올라가게 됩니다.



하지만 저돌적인 파펜하임은 군대를 제대로 정비하지 못한채 스웨덴 군대 속으로 돌진했으며,


스웨덴의 머스킷병에 일제 집중 사격을 당하며 전사하게 되고 황제군은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구스타프의 죽음



출처 : wikipedia



구스타프 좌익의 베른하르트는 발렌슈타인 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으며 열세에 놓이게 됩니다.


이 소식을 접한 구스타프는 베른하르트의 사기를 올리고 지원하기 위해 좌익으로 이동하였으며,


소수의 스몰란드 기병과 몇 명의 근위대만 이끌고 도랑을 건너게 됩니다.



하지만 좁은 숲 속의 도랑길에서 황제군의 피콜로 미니가 이끄는 기병대와 만나게 됩니다.


흉갑 기병으로 구성된, 수적으로도 우세였던 황제군의 공격에 구스타프는 퇴각하게 되지만,


황제군의 추격과 집중 사격을 받은 구스타프는 총에 맞아 전사하게 됩니다. 



구스타프의 죽음은 스웨덴 군의 사기를 떨어뜨립니다.


또한 스웨덴 중앙군이 황제군의 중앙군의 포에 밀리기 시작하며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스웨덴의 중앙군이 궤멸되고 발렌슈타인은 기병을 양쪽으로 나누어 스웨덴 군을 포위하고 일방적인 공격을 퍼붓게 됩니다.



스웨덴 군은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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