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백년 전쟁은 유럽의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을 말합니다.



백년 전쟁은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의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가 발단이 됩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혈연 관계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으며,


또한 영토 분쟁으로 인해 지속적인 갈등과 대립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약 100년 동안 끊이지 않았던 분쟁들을 통틀어 백년 전쟁이라 하며,


유럽 기사 계급 최고의 전성기이자 쇠퇴기로 접어드는 중요한 시점이기도 합니다.



백년 전쟁 시작 전의 상황



노르망디의 공작이었던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의 국왕이자 프랑스 국왕의 신하이기도 했습니다.


유럽은 중세 봉건제도잉글랜드의 국왕은 잉글랜드 왕국의 군주이자 프랑스 왕국의 신하라는 이중 지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남부부터 피레네 산맥의 북부를 아우르는 잉글랜드 왕국은,


오늘날의 영국과 프랑스 북서부의 노르망디 지역을 영토로 하고 있었습니다.


잉글랜드는 노르망디 왕조가 성립되면서 프랑스의 영토를 일부분 차지하고 있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잉글랜드 국왕의 영토가 프랑스 국왕의 영토보다 많아지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는 분쟁이 끊이지 않게 됩니다.





백년 전쟁의 발단



출처 : wikipedia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끊임없는 영토 분쟁 중 가스코뉴 지방의 지배권에 분쟁이 생기게 됩니다.


가스코뉴는 프랑스내의 영국 영토로 유럽 최대의 포도주를 생산하는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당시 가스코뉴에서 생산되는 포도주로 발생되는 세금이 영국 전체의 세금보다 많았습니다.



또한 노르망디 북서부에 위치한 플랑드르 지방의 지배권에도 첨예한 갈등이 이어지게 됩니다.


플랑드르 지방은 영국이 양모를 수출하여 직조하는 직물 생산의 핵심지역이었습니다.


프랑스는 이에 플랑드르 지방에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였으며 플랑드르는 영국과의 동맹을 통해 프랑스를 견제하려 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문제들이 얽혀 백년 전쟁이 시작되게 됩니다. 



백년 전쟁의 시작



출처 : wikipedia



프랑스 카페왕조의 샤를 4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게 됩니다.


당시 잉글랜드 왕국의 왕이었던 에드워드가 프랑스 카페왕조의 후계자임을 주장하고 나섭니다.


영토 분쟁에 후계자 갈등이 겹치며 백년 전쟁이 시작됩니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플랑드르에 양모 공급을 중하며 프랑스 수출을 금지합니다.


플랑드르는 영국의 편에 서서 프랑스에 대항하게 됩니다.


플랑드르 곳곳에서 반란이 시작되며 플랑드르 백작이 퇴출되게 됩니다.



에드워드 3세는 이 틈을 타 안티오크에 상륙하고 프랑스 군을 피해 빈 도시 약탈을 시작합니다.


프랑스 군과 잉글랜드 군의 정규군이 정식으로 만나 전투를 벌이기 전까지,


지역 위주의 작은 전투가 벌어지며 전쟁의 열기는 고조되기 시작합니다.



반응형
반응형


바이킹은 크게 세 개의 족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덴마크 지역을 중심으로 영국으로 진출했던 데인족,


스웨덴 지역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지방까지 진출한 스웨덴 바이킹,


노르웨이 지역을 중심으로 약탈 전사라고 불리던 노르웨이 바이킹이 있습니다.


▶덴마크 환율, 화폐 확인하기

▶스웨덴 환율, 화폐 확인하기

▶노르웨이 환율, 화폐 확인하기

▶바이킹 어원, 문화 확인하기





바이킹 시대, 파리 침공



출처 : wikipedia



8세기 말에서 11세기 중엽까지의 유럽은 바이킹 시대라 불릴만큼 바이킹의 세력이 확장되었습니다.


크고 작은 하천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 유럽은,


바이킹들의 특별한 설계로 제작되어진 바이킹배들이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바이킹의 배들은 센강을 가득 메우며 파리로 진격합니다.


845년부터 바이킹들은 본격적으로 파리를 침공하기 시작합니다.



835년 라그나 로스브로크는 데인족 바이킹 전사들을 이끌고 부활절에 파리를 침공합니다.


111명의 파리 군인을 포로로 잡은 바이킹은 전부를 교수형에 처하면서 공포를 유발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서프랑크의 왕 샤를 2세는 약 6톤의 금과 은으로 바이킹을 회유합니다.


하지만 이 회유책은 다른 바이킹족들의 연쇄 침략과 약탈을 야기시키게 됩니다.



885년 약 4만의 바이킹 전사들이 연합하여 파리를 침공하게 됩니다.


파리 시가의 중심지, 성탑과 2개의 다리로 요새화 한 시테섬에서, 


약 700척의 바이킹 배들이 내륙으로 진격이 불가능하자 바이킹 연합은 파리 포위전에 나서게 됩니다.


배에 탄 상태로 공선전을 치뤄야 했던 바이킹 전사들에게도 전투는 쉽지 않았습니다.


파리를 완전히 함락시키지는 못했지만 충분한 약탈은 성공한 바이킹은 주변의 마을과 성들을 다시 약탈하기 시작합니다.



1년여에 이른 포위전으로 파리의 시민들은 기아와 전염병으로 고통받게 되고, 


비만왕 샤를 3세는 바이킹과 협상을 시작합니다.


많은 은을 바이킹에게 지불하고 그 해 겨울철 약탈을 허용한다는 협상을 하게 됩니다.



롤로, 노르망디 공국 형성



노르만족 바이킹의 영웅 롤로는 10세기 초 노르망디 해안 지역을 침략합니다.


단순왕 샤를 3세는 롤로에게 노르망디 해안과 인근 지역을 내어주고 제후로 삼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노르망디 공국이 형성되게 됩니다.


샤를 3세의 요구는 롤로가 다른 바이킹의 침략을 방어하고 기독교로 개종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샤를 3세의 요구를 받아들인 롤로는 롤로에게 충성 서약을 맺습니다. 또한 샤를 3세의 딸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약탈과 상업을 생계 수단으로 하던 바이킹들에게 노르망디 공국의 제후가 되어 정착하며 안정된 삶을 살게된 롤로는,


큰 귀감과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이후 바이킹들은 전 세계로 진출하여 정착하게 됩니다.



잉글랜드 왕위 쟁탈전, 바이킹 워



출처 : wikipedia


1066년 잉글랜드의 참회왕 에드워드가 후사없이 사망하게 됩니다.


영국의 헤럴드 2세, 노르웨이의 하랄드 3세,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공작의 잉글랜드 왕위 찬탈전이 시작됩니다.


당시 유럽 전역으로 진출해 있던 바이킹들은 왕실과의 혼인으로 잉글랜드 왕위 계승에 복잡하게 연결이 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다양한 이해 관계로 인해 영국을 차지하는 사람이 유럽의 지휘권을 가져올 수도 있는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첫번째 전투는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로 영국의 헤럴드 2세와 노르웨이의 하랄드 3세 사이에 벌어집니다.


약 270척의 배에 노르웨이 군대를 이끌고 온 하랄드 3세는 잉글랜드 북부에 상륙한 뒤 요크를 점령합니다.


요크셔의 스탬퍼드 다리에서 만난 두 군대는 좁은 다리에서 쟁탈전이 펼쳐지게 되고


잉글랜드 군대의 화살 세례에 하랄드 3세는 전사하게 됩니다.



두번째 전투는 헤럴드 2세와 윌리엄 공작의 헤이스팅스 전투입니다.


언덕위에 진을 친 잉글랜드군은 지속되는 소모전과 방어전에 지쳐 집중력이 흐트러지게 됩니다.


노르만 기사단을 공격하기 위해 언덕을 내려온 잉글랜드의 병사 일부로 인해 전열이 흐트러지게 됩니다.

 

이 틈을 놓치지 않은 윌리엄 공작은 잉글랜드군을 향해 돌진하고 윌리엄 공작의 승리로 전투가 마무리 됩니다.


이로써 노르만 왕조의 정복왕 윌리엄이 탄생하게 됩니다.





로빈 후드



로빈 후드의 배경이 바로 노르만 왕조의 정복왕 윌리엄 2세의 탄생입니다.


잉글랜드의 헤럴드 2세는 앵글로색슨 왕가의 마지막 왕이었으며,


노르만 왕조가 등장하면서 피지배층으로 전락한 앵글로색슨족의 노르만 족을 상대로 한 투쟁을 그린 작품입니다.



바이킹에 대한 평가와 바이킹 시대의 종식



약탈자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무역과 상업을 발달시키며 오늘날의 유럽을 만들었다는 평을 듣습니다.


유럽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바이킹인이면서 모두 바이킹인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듯이,


바이킹의 영향은 유럽 사회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각 나라의 상업과 교역을 촉진시켰으며 전 세계의 문화 교류에도 크게 이바지합니다.


정복이 아닌 다른 나라의 문화에 동화되고 흡수하고 융화되며 문화의 다양성을 꽃피웁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착과 융화는 바이킹 시대를 종식시키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전사에서 상인으로 변모하며 정착 생활에 익숙해진 바이킹들은 


엄밀히 말하면 바이킹이 없어졌다기 보다 해적질을 하며 약탈을 일삼은 바이킹들이 사라졌다고 하는것이 맞습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