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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교와 신교의 전쟁에서 신교는 구교에게 밀리며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거듭되는 구교의 승리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에게 힘을 실어주게 되었으며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의 군대와 자금을 바탕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합니다.


프랑스의 슐리외 추기경은 페르디난트와 발렌슈타인을 분열하게 만들었으며


발렌슈타인은 해임된 채 전선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이때 신교의 위기를 타파할 스웨덴의 구스타프가 등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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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참전



1630년 스웨덴은 1만 3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독일 베를린의 우제돔에 상륙하게 됩니다.


스웨덴의 구스타프는 해안에 상륙하여 해안 근처의 황제군을 몰아내며 거점 확보에 힘을 씁니다.


하지만 신교인 개신교들은 단합이 잘 되지 않았으며 스웨덴군이 상륙했음에도 중립을 표방합니다.



개신교 루터파의 최대 세력인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와 캘빈파였던 게오르크 빌헬름이 신교 연합에 가담합니다.


또한 구교였던 프랑스가 스웨덴에 5년간 군자금 지원을 약속하며 스웨덴은 힘을 얻게 됩니다.





마그데부르크



마그데부르크는 작센을 지나기 위한 주요 관문으로 황제군이 주둔하는 지역 근방이었습니다.


스웨덴의 구스타프는 마그데부르크를 점령하기 위해 사전에 신교도 봉기를 일으키며 준비를 했지만,


돌연 마그데부르크 점령을 포기합니다.


황제군의 명장 틸리의 부하인 파펜하임이 마그데부르크로 입성하게 되며 대약탈이 시작됩니다.


상업도시이자 공업도시였던 마그데부르크를 황제군의 거점으로 삼으려했던 틸리의 계획은 어긋나게 되며,


마그데부르크에서의 구교의 약탈은, 중립을 표방하던 신교 세력을 구스타프의 편에 서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라이프치히 탈환 작전, 브라이턴펠트 전투



출처 : wikipedia



파펜하임은 메르세부르크와 라이프치히를 차례로 점령하는 과정에 폭압적인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에 작센의 게오르크는 신교인 스웨덴의 편에 서게 됩니다.



라이프치히를 점령한 틸리의 군대와 라이프치히를 탈환하려는 구스타프와 작센 연합군은


라이프치히 북방 6km 떨어진 브라이턴 펠트에서 대치하게 됩니다.


신교 연합군은 2만 4천의 스웨덴군과 1만 8천의 작센군으로 구성되었으며 구교인 틸리군은 약 3만 5천의 병사가 있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자 틸리는 전통적인 테르시오 대형으로 진격하고 이에 놀란 작센군은 도망칩니다.


전투 경험이 많던 스웨덴군은 소형화 된 대포를 이용하여 테르시오 대형에 집중 포격을 가합니다.


또한 3열이 동시에 사격하는 전술을 사용하며 틸리군을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틸리의 군대는 스웨덴 군대의 공격에 와해되기 시작하고, 신교가 구교를 이기는 첫 전투로 막이 내립니다.


황제군의 피해는 막대했으며 군대의 80%가 사망하거나 포로가 됩니다.


틸리와 파펜하임 역기 부상을 당하게 됩니다.


스웨덴의 구스타프는 작센의 게오르크를 절대 믿지 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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