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 전쟁 최대의 격전 뤼첸 전투가 후반기로 들어섭니다.



구교의 명장 파펜하임이 스웨덴 머스킷병에 의해 사망하게 되고,


신교의 스웨덴 황제 구스타프 역시 황제군의 기병에 의해 전사하게 되며


뤼첸 전투는 그 마지막을 향해 달려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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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첸 전투 후반기



출처 : wikipedia



구스타프의 죽음은 스웨덴 군의 사기를 일시적으로 떨어뜨리게 됩니다.


중앙의 스웨덴 군은 황제군의 포병에 밀리며 전멸의 위기에 처하지만,


스웨덴 중앙군은 다시 전열을 가다듬어 황제군을 향해 돌진합니다.



스웨덴군의 좌익에서 고전 중이던 작센군과 베른하르트 역시 끈질기게 황제군에 저항하며,


황제군의 공격을 7차례 막아내는 선전을 펼칩니다.


구스타프의 죽음으로 지휘권을 잡은 베른하르트는 병사들을 독려하고 사기를 끌어올리며,


전장에서의 죽음을 각오한 채 황제군을 향해 전 병력을 이끌고 돌진합니다.


또한 스웨덴군의 예비대 사령관 크니프하우제가 적절한 타이밍에 예비대를 합류시킴으로,


불리했던 스웨덴 군의 전세가 역전되어 황제군을 밀어붙이기 시작합니다.



뤼첸 전투로 인해 황제군의 주요 지휘관 대부분이 전사하게 되고


발렌슈타인은 부상을 당한채 도망갔으며 황제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30년 전쟁 중 가장 치열한 전투 뤼첸 전투는 신교 스웨덴 군의 승리로 끝이 나게 됩니다.





30년 전쟁 마무리



구스타프의 죽음으로 스웨덴의 황제와 신교의 지휘관의 자리가 공석이 됩니다.


구스타프의 딸 크리스티나가 스웨덴의 국왕에 오르게 되고 구스타프의 부하인 호른과 베른하르트가 지휘관이 됩니다.


전쟁으로 인해 재정이 약해진 스웨덴은 신교 지원을 위한 전쟁 자금을 끊어버리게 되고, 


스웨덴을 지원했던 프랑스 역시 구스타프의 죽음으로 지원을 중단하게 됩니다.



구교는 스페인이 2만의 병력을 파병하면서 전세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게 됩니다.


구교와 신교는 뇌르틀링겐에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구스타프가 없는 신교의 군대는 각개격파를 당하며 구교 스페인군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게 됩니다.


스페인군의 목표는 네덜란드였으며 네덜란드로 가는 길의 신교 세력권을 구교로 반환시킵니다.



1635년 독일의 남부 대부분은 구교가 점령하게 됩니다.



프랑스의 개입과 베스트팔렌 조약



출처 : Wikipedia



1635년 구교와 신교의 30년 전쟁 막바지에 프랑스가 개입하게 됩니다.


프랑스의 개입은 스페인을 다시금 전쟁에 끌어들이는 계기가 됩니다.



스페인의 개입으로 구교가 다시금 힘을 얻었지만, 스웨덴의 남은 군대가 2차 브라이턴펠트 전투에서 구교를 궤멸시키고,


프랑스 군대가 스페인 군대를 네덜란드 영지에서 완전히 축출시키며 스페인은 본토로 쫓겨나게 됩니다.



페르디난트 2세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된 페르디난트 3세는 휴전에 동의하고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게 됩니다.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신성로마제국은 분리, 독립하게 되었으며 지역별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게 됩니다.




스웨덴의 참전으로 신교는 구교에게 승리를 쟁취하게 됩니다.



스웨덴의 구스타프는 군사 개혁을 통해 신교 군대를 막강하게 재정비합니다.


신교군에게 처음으로 패배한 구교는 발렌슈타인을 다시 불러들이게 됩니다.


신교의 구스타프와 구교의 발렌슈타인이 전장에서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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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턴펠트 전투 이후 스웨덴 구스타프의 상황



브라이턴펠트 전투에서 구교의 틸리를 격파한 신교의 구스타프는 신교에게 첫 승리를 안겨주었지만,


본인의 영지가 아닌 독일의 땅에서 원정 전투를 하고 있다는 한계로 인해 더 이상 진격을 하지 못합니다.


또한 신교 작센의 게오르크가 브라이턴펠트 전투에서 구스타프를 지원하지 않은채,


전투에서 도망친 이력으로 게오르크에게 믿음이 사라진 것도 진격을 멈춘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구교인 프랑스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강력한 스웨덴 군대를 확인한 프랑스는


스웨덴이 유럽 본토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을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구교와 신교의 대립과 연합, 음모와 계략 속에서 구스타프는 신교 연합을 결성하고,


독일 북부의 신교 동맹은 비교적 견고해지게 됩니다.





레흐강 전투



출처 : wikipedia



1632년 4월 신교인 구스타프의 군대와 구교인 틸리의 군대가 레흐강에서 결전을 벌이게 됩니다.


구교인 황제군의 명장 틸리는 수비하기 최적의 장소인 언덕 위에 진영을 꾸리고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이에 신교인 구스타프의 스웨덴 군은 경량포를 신속하게 전면 배치하며 구교를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신교의 군대는 틸리의 구교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강을 건너 언덕으로 진격을 해야 했으며,


강을 건너야하는 절대적인 불리함 속에서 전투를 진행해야 했습니다.


강을 도하해야 하는 상황에 구스타프는 핀란드군 400명을 선발대로 보내 배를 이어 다리를 만들게 합니다.


핀란드군이 다리를 만드는 동안 스웨덴은 경량포로 다리 건너의 틸리군을 견제하였으며,


틸리군은 이를 효과적으로 저지하지 못한 채 스웨덴군이 강을 도하하는 것을 허용합니다.



구스타프의 신교 군대와 틸리의 구교 군대의 전투가 벌어지고,


전투 중 구교의 명장 틸리가 부상을 입으며 황제군은 퇴각하게 됩니다.


레흐강 전투는 스웨덴의 구스타프의 승리로 끝나게 되며 부상을 입은 틸리는 얼마 후 파상풍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발렌슈타인 황제군 총사령관 복귀와 뤼첸 전투의 시작



틸리를 잃은 황제군은 발렌슈타인을 황제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총사령관이 된 발렌슈타인은 구교 세력의 지원을 받으며 병력을 모아 전투에 대비하게 됩니다.


구교의 저돌적인 장군인 파펜하임의 합류로 발렌슈타인은 큰 힘을 얻게 됩니다.


구교는 발렌슈타인과 파펜하임의 2만 6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신교는 구스타프의 스웨덴군과 독일 북부의 군대 1만 8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전염병으로 군마의 70%를 잃은 구스타프는 결전을 미루고 후퇴를 했고,


후퇴 소식을 들은 파펜하임은 보급품 확보를 위해 라인 교구대에 5천의 기병대를 이끌고 출진하게 됩니다.


파펜하임의 5천의 기병대가 발렌슈타인군과 분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구스타프는 후퇴를 멈추고


발렌슈타인을 공격하기 위해 되돌아오게 되고 뤼첸 마을에서 30년 전쟁의 가장 큰 전투인 뤼첸 전투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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