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교의 구스타프는 구교의 발렌슈타인을 향해 돌진합니다.



스웨덴의 구스타프가 30년 전쟁에 참여하면서,


신교는 브라이턴펠트 전투 레흐강 전투에서 승리를 쟁취하며 구교를 압박하게 됩니다.


구스타프와 발렌슈타인은 뤼첸에서 전투를 벌이게 되며,


30년 전쟁 사상 가장 중요하며 가장 치열했던 격전의 전투 뤼첸 전투가 벌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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뤼첸 전투



출처 : wikipedia



계절이 겨울로 접어들게 되어 작은 마을인 뤼첸에 숙영지를 꾸리던 발렌슈타인은


파펜하임이 보급품 확보를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구스타프가 뤼첸으로 진격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오전 7시 스웨덴군은 발렌슈타인의 황제군을 향해 진격하고, 오전 9시 양측의 군대는 서로를 확인하게 됩니다.


오전 10시 양 측은 서로를 향해 포를 발사하며 견제를 하다가, 오전 11시 구스타프가 기병을 이끌고 돌진합니다.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에 진을 친 발렌슈타인은 대포 약 20문을 설치하고 방어진을 꾸렸으며,


스웨덴 군은 황제군을 공격하기 위해 2개의 도랑을 건너야 하는 불리한 위치에서 공격을 전개해야 했습니다.



스웨덴 군은 도랑을 건너기 위해 포병을 도랑앞에 배치하여 황제군의 머스킷병을 공격합니다.


황제군 역시 포 공격으로 스웨덴군을 저지했으며 양쪽의 피해가 늘어갑니다.


스웨덴 군은 도랑 건너의 황제군 포병을 제압하고,


또한 우익의 구스타프의 기병이 발렌슈타인의 좌익을 공격하며 황제군의 중앙군을 위협하게 됩니다.



열세에 놓인 발렌슈타인은 포병대와 기병대를 활용하여 방어에 열중했으며,


파펜하임과 크로아티아 기병이 다시 전선에 합류를 하게 되며 사기가 올라가게 됩니다.



하지만 저돌적인 파펜하임은 군대를 제대로 정비하지 못한채 스웨덴 군대 속으로 돌진했으며,


스웨덴의 머스킷병에 일제 집중 사격을 당하며 전사하게 되고 황제군은 붕괴하기 시작합니다.





구스타프의 죽음



출처 : wikipedia



구스타프 좌익의 베른하르트는 발렌슈타인 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으며 열세에 놓이게 됩니다.


이 소식을 접한 구스타프는 베른하르트의 사기를 올리고 지원하기 위해 좌익으로 이동하였으며,


소수의 스몰란드 기병과 몇 명의 근위대만 이끌고 도랑을 건너게 됩니다.



하지만 좁은 숲 속의 도랑길에서 황제군의 피콜로 미니가 이끄는 기병대와 만나게 됩니다.


흉갑 기병으로 구성된, 수적으로도 우세였던 황제군의 공격에 구스타프는 퇴각하게 되지만,


황제군의 추격과 집중 사격을 받은 구스타프는 총에 맞아 전사하게 됩니다. 



구스타프의 죽음은 스웨덴 군의 사기를 떨어뜨립니다.


또한 스웨덴 중앙군이 황제군의 중앙군의 포에 밀리기 시작하며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스웨덴의 중앙군이 궤멸되고 발렌슈타인은 기병을 양쪽으로 나누어 스웨덴 군을 포위하고 일방적인 공격을 퍼붓게 됩니다.



스웨덴 군은 큰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스웨덴의 참전으로 신교는 구교에게 승리를 쟁취하게 됩니다.



스웨덴의 구스타프는 군사 개혁을 통해 신교 군대를 막강하게 재정비합니다.


신교군에게 처음으로 패배한 구교는 발렌슈타인을 다시 불러들이게 됩니다.


신교의 구스타프와 구교의 발렌슈타인이 전장에서 만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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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이턴펠트 전투 이후 스웨덴 구스타프의 상황



브라이턴펠트 전투에서 구교의 틸리를 격파한 신교의 구스타프는 신교에게 첫 승리를 안겨주었지만,


본인의 영지가 아닌 독일의 땅에서 원정 전투를 하고 있다는 한계로 인해 더 이상 진격을 하지 못합니다.


또한 신교 작센의 게오르크가 브라이턴펠트 전투에서 구스타프를 지원하지 않은채,


전투에서 도망친 이력으로 게오르크에게 믿음이 사라진 것도 진격을 멈춘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구교인 프랑스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강력한 스웨덴 군대를 확인한 프랑스는


스웨덴이 유럽 본토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을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구교와 신교의 대립과 연합, 음모와 계략 속에서 구스타프는 신교 연합을 결성하고,


독일 북부의 신교 동맹은 비교적 견고해지게 됩니다.





레흐강 전투



출처 : wikipedia



1632년 4월 신교인 구스타프의 군대와 구교인 틸리의 군대가 레흐강에서 결전을 벌이게 됩니다.


구교인 황제군의 명장 틸리는 수비하기 최적의 장소인 언덕 위에 진영을 꾸리고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이에 신교인 구스타프의 스웨덴 군은 경량포를 신속하게 전면 배치하며 구교를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신교의 군대는 틸리의 구교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강을 건너 언덕으로 진격을 해야 했으며,


강을 건너야하는 절대적인 불리함 속에서 전투를 진행해야 했습니다.


강을 도하해야 하는 상황에 구스타프는 핀란드군 400명을 선발대로 보내 배를 이어 다리를 만들게 합니다.


핀란드군이 다리를 만드는 동안 스웨덴은 경량포로 다리 건너의 틸리군을 견제하였으며,


틸리군은 이를 효과적으로 저지하지 못한 채 스웨덴군이 강을 도하하는 것을 허용합니다.



구스타프의 신교 군대와 틸리의 구교 군대의 전투가 벌어지고,


전투 중 구교의 명장 틸리가 부상을 입으며 황제군은 퇴각하게 됩니다.


레흐강 전투는 스웨덴의 구스타프의 승리로 끝나게 되며 부상을 입은 틸리는 얼마 후 파상풍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발렌슈타인 황제군 총사령관 복귀와 뤼첸 전투의 시작



틸리를 잃은 황제군은 발렌슈타인을 황제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총사령관이 된 발렌슈타인은 구교 세력의 지원을 받으며 병력을 모아 전투에 대비하게 됩니다.


구교의 저돌적인 장군인 파펜하임의 합류로 발렌슈타인은 큰 힘을 얻게 됩니다.


구교는 발렌슈타인과 파펜하임의 2만 6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신교는 구스타프의 스웨덴군과 독일 북부의 군대 1만 8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전염병으로 군마의 70%를 잃은 구스타프는 결전을 미루고 후퇴를 했고,


후퇴 소식을 들은 파펜하임은 보급품 확보를 위해 라인 교구대에 5천의 기병대를 이끌고 출진하게 됩니다.


파펜하임의 5천의 기병대가 발렌슈타인군과 분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구스타프는 후퇴를 멈추고


발렌슈타인을 공격하기 위해 되돌아오게 되고 뤼첸 마을에서 30년 전쟁의 가장 큰 전투인 뤼첸 전투가 시작됩니다.




덴마크의 참전은 30년 전쟁의 새로운 국면을 기대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덴마크 역시 구교의 명장 틸리에게 무릎을 꿇으며 신교의 전세 역전에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독일에서 시작된 구교와 신교의 대립은 수 많은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얽혀있었습니다.


유럽 전역의 국가, 왕, 귀족들의 갈등과 연합 


그리고 외교, 정치, 경제가 관계된 민감하고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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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의 독주



구교와 스페인의 지원을 받아 보헤미아 왕으로 등극했던 페르디난트 2세는, 


프라하 투척사건 당시 보헤미아에 부재중이었으며 


프라하 투척사건으로 보헤미아를 장악한 신교의 지원을 받은 프리드리히 5세가 보헤미아의 왕으로 추대됩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마침 사망하게 되고 페르디난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추대됩니다.



황제가 되었지만 보헤미아의 왕 자리를 빼앗긴 페르디난트는 프리드리히 5세를 반역자로 규정하고,


본격적인 구교와 신교의 전쟁이 시작됩니다.


백산 전투를 시작으로 데사우 다리 전투와 루터 전투까지 신교는 구교에 단 한번도 승리를 쟁취하지 못한채


구교의 일방적인 승리로 모든 상황은 정리되는 듯 했습니다.



신교의 세력을 제압한 페르디난트는 1629년 토지 반환령을 명령하여 빼앗긴 카톨릭 교인들의 토지를 돌려받게 합니다. 


페르디난트의 토지 반환령은 경제 공황을 야기시키게 되고 유럽의 혼란을 야기시킵니다.


할베르슈타트 교구에 자신의 아들을 임명하는 등 자신의 측근들을 구교 세력의 중심에 임명하기 시작합니다.



페르디난트는 북이탈리아까지 진출하며 스페인과 이탈리아, 프랑스와 갈등에 불을 지폈으며


독단적인 결정과 배후의 세력인 발렌슈타인에게 의지하는 언행은 선거후들이 등을 돌리게 되는 원인이 됩니다.





프랑스 리슐리외 추기경



출처 : wikipedia



페르디난트의 세력을 견제하고 배후의 인물인 발렌슈타인을 제거하기 위해 프랑스의 리슐리외 추기경이 움직입니다.


프랑스의 주교이자 실권자였던 리슐리외 추기경은 발렌슈타인이 페르디난트를 부추겨


프랑스나 스페인과 같은 강력한 전제적 황제가 된다면 프랑스에 큰 위협이 될것임을 우려했습니다.


리슐리외 추기경은 선거후의 배후에 자신의 세력을 심어 발렌슈타인을 몰아내기 위한 여론을 조성합니다.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의 군대와 돈을 이용해 독일에 대한 의존도를 벗어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려 했으며,


발렌슈타인은 페르디난트를 이용해 독일내에서의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하려고 했습니다.



구교인 카톨릭 국가였던 프랑스의 리슐리외는 신교를 지원하게 되고 구교의 분열이 시작됩니다.


이러한 상황에 독일 제후들과 막시밀리안이 연합하여 페르디난트를 압박하게 되고,


페르디난트는 결국 막시밀리안을 선택하며 발렌슈타인을 해임하게 됩니다.



페르디난트의 구교 세력은 약화되기 시작했으며, 강력한 신교의 스웨덴군이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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