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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세력의 침략으로 비잔티움은 세력이 축소됩니다.



최대의 곡물 생산지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를 잃었으며,


동서 무역의 중요 거점지인 시리아를 비롯한 소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1040년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이란, 이라크, 시리아를 지배한 제국, 


셀주크 튀르크의 등장은 비잔틴 제국의 쇠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만지케르트 전투



출처 : wikipedia


1071년 비잔티움 제국과 셀주크 제국의 전투가 벌어집니다.


11세기에 급격히 성장한 셀주크 투르크는 예루살렘과 팔미라 등 비잔티움 제국의 동쪽 영토를 점령합니다.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비잔티움에 장군 출신의 로마누스 4세 황제가 등장하게 됩니다.



황제가 된 로마누스 4세는 셀주크 투르크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6만의 군대를 이끌고 출정합니다.


로마누스는 셀주크 투르크의 제 2대 술탄 알프 아르슬란의 군대와 만지케르트에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셀주크 투르크의 아르슬란은 유목 경기병의 전술 특징인 유인책을 사용하여 로마누스의 군대를 유인합니다.


치고 빠지는 전술로 로마누스의 군대를 유인한 아르슬란은 해가 저물어 퇴각하는 비잔티움 군대를 급습하고


혼란에 빠진 비잔티움 군대는 포위 당한채 셀주크 투르크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다양한 민족의 용병들로 이루어진 로마누스 군대는 무너지게 되고 로마누스는 포로가 됩니다.



아르슬란은 포로가 된 로마누스를 풀어줍니다.


비잔티움으로 돌아가던 로마누스는 황제의 자리를 노리던 안드로니쿠스 두카스 장군의 공격을 받고,


포로가 되어 눈이 뽑힌채 비잔티움으로 돌아가던 중 객사하게 됩니다.


비잔티움은 셀주크 투르크에게 소아시아를 완전히 빼앗기게 되면서 더 이상 제국이 아닌 도시 국가로 전락합니다.





십자군 전쟁의 시작



로마의 영토였던 예루살렘이 셀주크 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자 유럽은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비잔티움은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교황은 교황의 이름으로 군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합니다.


교황은 당시 기독교 국가들의 왕이었으며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신의 군대 십자군을 파병합니다.


여러 번의 십자군 원정이 있었지만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 4차 십자군 원정대가 비잔틴 제국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알렉시우스 4세



출처 : wikipedia



알렉시우스 4세는 비잔틴 제국을 큰 위기에 빠뜨린 인물입니다.


아버지인 이사키우스가 삼촌 알렉시우스 3세에 의해 강제 폐위를 당하게 되자,


알렉시우스 4세는 복수를 다짐하며 교황을 찾아가게 됩니다.


십자군을 동원해 왕위 찬탈을 도와주면 원정 비용과 막대한 보상금을 준다고 했지만 거절당하게 됩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예루살렘 성지 찬탈을 위한 4차 십자군이 결성되었지만,


막대한 자금 조달의 문제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알렉시우스 4세는 이를 이용해 4차 십자군에게 막대한 보상금을 약속하며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하게 됩니다.



베네치아군과 십자군은 치열한 접전 끝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한 알렉시우스 4세는 성문을 닫은 채 십자군에게 보상금을 줄 수 없다고 말을 바꿉니다.


십자군과 베네치아군은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게 되고,


다시 시작된 전쟁에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알렉시우스 4세는 알렉시우스 5세에 의해 암살당하게 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함락되었으며 약탈과 학살이 시작됩니다.



더 이상 재기불능에 빠진 비잔티움은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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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창과 확장을 하던 비잔티움 제국은 쇠퇴기에 접어들게 됩니다.



옛 로마의 영토 대부분을 수복한 유스티니아누스 대제의 사망 후,


최대의 곡창 지대인 이집트와 동서 무역의 거점 시리아까지 이민족에 의해 빼앗기게 됩니다.


북아프리카와 소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이 사라진 비잔티움 제국은 1453년 멸망하게 됩니다.


▶ 유스티니아누스 확인하기



이슬람 세력의 침입, 야르무크 전투



출처 : wikipedia



7세기, 세력 확장을 위해 이슬람 세력은 비잔티움 제국을 노리기 시작합니다.


636년 시리아와 요르단 국경 사이인 야르무크 강에서 비잔티움 제국과 아랍 세력의 야르무크 전투가 일어납니다.


야르무크 전투에서 비잔틴 제국은 완패하며 이슬람 세력에게 아나톨리아 남부의 지배권을 상실하게 됩니다.



이슬람 세력은 당시 기독교 세력이 지배하던 레반트 지역으로의 진출을 갈망하고 있었으며,


야르무크 전투의 승리로 무슬림 정복 전쟁의 정복 역사에 큰 획을 긋게 됩니다.


이슬람 세력의 위대한 전술가이자 지휘관인 할리드 이븐 알왈리드가 등장한 전투이기도 합니다.



동서 무역의 요지인 시리아와 팔미라가 이슬람세력에 의해 점령당하고,


637년 예루살렘, 이집트, 페르시아까지 정복한 이슬람 세력은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하며 공성전을 펼칩니다.


아랍 세력의 침입으로 최대의 곡창 지대 이집트를 상실하였고,


슬라브족의 세력 확장으로 발칸 반도 남쪽의 지배권이 약하게 됩니다.





비잔티움 제국의 무기



출처 : wikipedia



1. 그리스의 불



그리스의 불은 오늘날의 화염 방사기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리스의 불은 불이 붙은 자리에 물을 뿌리면 오히려 더 번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물속에서도 사용 가능했던 그리스의 불의 제조법은 아직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633년 비잔티움을 위협하던 이슬람 세력은 674년 본격적인 침공을 감행합니다.


비잔티움은 그리스의 불을 사용하여 이슬람 군대를 전멸시키는 성과를 올리게 됩니다.



717년 1,800여척의 함대와 8만여 군대의 이슬람 세력이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지만


목재 함대를 사용하던 이슬람 군대의 배에 또 다시 그리스의 불이 사용되며 이슬람 군대가 전멸합니다.




2. 황금뿔 만의 철쇠



황금뿔 만은 콘스탄티노플에 접한 해협으로 콘스탄티노플의 항구와 군사적 방어선 역할을 합니다.


콘스탄티노플의 입구에 황금뿔 만의 철쇠를 설치하여 적군의 배를 저지하고 봉쇄하는 역할을 합니다.


이슬람 함대를 황금뿔 만 (골든 혼 Golden Horn) 으로 유인하여,


황금뿔 만의 철쇠로 함대를 가두어 놓은 후 그리스의 불로 함대를 격파하는 전략을 사용합니다.



그리스의 불과 황금뿔 만의 철쇠는 비잔티움 제국을 천 년 동안 지켜줍니다.


콘스탄티누스 1세는 그리스의 불을 가르켜 하늘의 천사가 내려준 비방이라 했으며


유럽인들이 가장 탐냈던 비잔티움의 보물 중 하나가 그리스의 불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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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초대 황제로 등극합니다.



로마의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합니다.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던 시기부터 로마를 팍스 로마나 기간이라고 부르며,


기원전 27년부터 180년까지의 시대를 뜻합니다.


이전까지의 영토 확장 전쟁과 내전이 빈번하게 일어나던 시기와는 달리,


팍스 로마나 시대는 약 200년간의 로마 평화 시기를 의미합니다.


▶ 카이사르 성장 학인하기

▶ 옥타비아누스 확인하기



팍스 로마나 시대 이후



출처 : flickr



팍스 로마나 시대 이후 황실의 근위대가 황제를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쥐게 됩니다.


약 50년 동안 20명이 넘는 황제가 교체되었으며 황제의 자리를 두고 입찰 경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돈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황제가 될 수 있었으며 로마 내부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외부의 이민족들이 로마를 침략하기 시작합니다.


동쪽에서는 사산조 페르시아가 북쪽에서는 슬라브족과 게르만족이 로마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넓은 영토로 인해 이민족의 침략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없었으며 이것은 가장 큰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동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의 시작





로마는 넓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로마를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누기로 결정합니다.



330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현재 터키이스탄불을 콘스탄티노플이라 명하고,


비잔티움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정하게 됩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동로마입니다.


▶ 터키 환율, 화폐, 역사 확인하기



395년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동로마와 서로마를 구분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동로마 제국 역시 로마 제국으로 불렸으며 주변의 나라들도 로마 제국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구분하는 것은 편의상이며 서유럽 중심의 역사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은 동서 무역의 중심지로, 


그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단기간에 유럽 전체 국가 중 가장 부유한 도시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에 반해 서로마 제국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콘스탄티노플이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지만 로마 제국의 수도는 이탈리아 반도에 위치한 로마라는 인식으로 인해


서로마 제국으로의 이민족들의 침략이 끊이지 않습니다.


동로마 제국으로 침략하던 이민족들 역시 동로마 제국을 침략하지 않는 대가로 돈을 지불받고,


서로마로 진격해 서로마를 침략하게 됩니다.



군기마저 약해진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을 용병으로 채용하고 있었는데


이것 역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큰 이유가 됩니다.


로마군의 절반 가량이 용병군이었으며 점점 치솟는 용병들의 몸값은 로마 재정 파탄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476년 서로마는 고트족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과거 로마 제국의 영광은 사라지고 동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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