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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본대가 예루살렘으로 진격합니다.



1차 십자군 전쟁의 서막이 오르게 됩니다.


타란토의 보에몽, 부용의 고르푸르아, 볼로듀의 보두앵, 툴루즈의 레몽 등


유럽 각지의 군주들이 콘스탄티노플로 집결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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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주크 투르크 니케아 함락



출처 : wikipedia



당시 셀주크 투르크의 왕이었던 아르슬란은 십자군이 공격해온다는 소식을 듣지만,


민중 십자군의 형편 없는 실력에 방심을 하여 십자군 본대의 침공까지 무시해버립니다.


셀주크의 수도였던 니케아를 비우고 형제들과의 권력 싸움에 몰두하던 아르슬란


니케아가 십자군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황급히 니케아로 돌아옵니다.


십자군과 전면전에 나선 셀주크 투르크는 전투에서 패하게 되며,


아르슬란은 니케아의 시민들을 학살하지 않는 조건을 내세우며 비잔티움에게 항복을 약속합니다.



비잔티움은 니케아 성을 점령하고 약속대로 학살을 금지합니다.


전투는 십자군이 했지만 모든 이익은 비잔티움이 챙기게 된 상황이 발생하자,


십자군과 비잔티움의 갈등은 깊어가고 니케아 공방 이후 비잔티움은 십자군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지합니다.





안티오크 전투



니케아에서 쫓겨나듯 나온 십자군은 안티오크를 향해 진격합니다.


안티오크는 망루 400개가 있었으며 총 성벽의 길이가 12km에 달하는 요새였습니다.



안티오크에 다다른 십자군은 약 1만명 정도였으며 병력이 매우 열세인 상황이었습니다.


비잔티움의 지원이 끊기고 기나긴 행군에 지친 십자군은 굶주림에 시달립니다.



반면 안티오크 성안의 오스만 투르크는 상대적으로 식량이 풍부한 상황이었습니다.


안티오크의 군주 야기 시안은 성 안의 기독교인들을 성 밖으로 내보내 참호를 파라고 명령한 뒤 성을 닫아버립니다.


십자군은 성 밖으로 나온 기독교인들의 식량까지 지원을 해야했으며 식량난이 더욱 심해집니다.



십자군에 포위된 안티오크는 근처의 이슬람 세력에게 지원을 요청하지만,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는 서로간의 세력 싸움으로 인해 지원을 거부합니다.


지원에 응한 모술은 지원군을 파견하지만 안티오크로 바로 지원을 오지 않고, 세력 확장을 위해 에데사로 향하게 됩니다.



지원이 오지 않자 절망감에 빠진 안티오크군은 십자군의 보에몽과 내통을 하게 되고 성은 함락됩니다.


처음에는 유리한 상황이었지만 지원군이 오지 않은 안티오크는 십자군에 의해 점령당하게 되고,


안티오크를 점령한 십자군은 중요한 거점을 확보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공방전



출처 : wikipedia



1099년 6월 안티오크를 점령한 십자군은 예루살렘으로 진격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이슬람 시아파인 이집트 파티마 왕조가 지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안티오크에서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는 십자군은 약탈하지 않는 조건으로 수니파의 도움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공성탑으로 밀어 붙인 십자군은 예루살렘 탈환에 성공합니다.



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탈환하며 승리를 쟁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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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세력의 침략으로 비잔티움은 세력이 축소됩니다.



최대의 곡물 생산지 이집트와 북아프리카를 잃었으며,


동서 무역의 중요 거점지인 시리아를 비롯한 소아시아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게 됩니다.


1040년 중앙아시아를 비롯한 이란, 이라크, 시리아를 지배한 제국, 


셀주크 튀르크의 등장은 비잔틴 제국의 쇠퇴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됩니다.



만지케르트 전투



출처 : wikipedia


1071년 비잔티움 제국과 셀주크 제국의 전투가 벌어집니다.


11세기에 급격히 성장한 셀주크 투르크는 예루살렘과 팔미라 등 비잔티움 제국의 동쪽 영토를 점령합니다.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은 비잔티움에 장군 출신의 로마누스 4세 황제가 등장하게 됩니다.



황제가 된 로마누스 4세는 셀주크 투르크에게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6만의 군대를 이끌고 출정합니다.


로마누스는 셀주크 투르크의 제 2대 술탄 알프 아르슬란의 군대와 만지케르트에서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셀주크 투르크의 아르슬란은 유목 경기병의 전술 특징인 유인책을 사용하여 로마누스의 군대를 유인합니다.


치고 빠지는 전술로 로마누스의 군대를 유인한 아르슬란은 해가 저물어 퇴각하는 비잔티움 군대를 급습하고


혼란에 빠진 비잔티움 군대는 포위 당한채 셀주크 투르크의 공격을 받게 됩니다.


다양한 민족의 용병들로 이루어진 로마누스 군대는 무너지게 되고 로마누스는 포로가 됩니다.



아르슬란은 포로가 된 로마누스를 풀어줍니다.


비잔티움으로 돌아가던 로마누스는 황제의 자리를 노리던 안드로니쿠스 두카스 장군의 공격을 받고,


포로가 되어 눈이 뽑힌채 비잔티움으로 돌아가던 중 객사하게 됩니다.


비잔티움은 셀주크 투르크에게 소아시아를 완전히 빼앗기게 되면서 더 이상 제국이 아닌 도시 국가로 전락합니다.





십자군 전쟁의 시작



로마의 영토였던 예루살렘이 셀주크 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자 유럽은 동요하기 시작합니다.


비잔티움은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교황은 교황의 이름으로 군대를 파병하기로 결정합니다.


교황은 당시 기독교 국가들의 왕이었으며 절대 권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신의 군대 십자군을 파병합니다.


여러 번의 십자군 원정이 있었지만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한 4차 십자군 원정대가 비잔틴 제국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알렉시우스 4세



출처 : wikipedia



알렉시우스 4세는 비잔틴 제국을 큰 위기에 빠뜨린 인물입니다.


아버지인 이사키우스가 삼촌 알렉시우스 3세에 의해 강제 폐위를 당하게 되자,


알렉시우스 4세는 복수를 다짐하며 교황을 찾아가게 됩니다.


십자군을 동원해 왕위 찬탈을 도와주면 원정 비용과 막대한 보상금을 준다고 했지만 거절당하게 됩니다.



당시 유럽에서는 예루살렘 성지 찬탈을 위한 4차 십자군이 결성되었지만,


막대한 자금 조달의 문제로 어려움에 처해 있었습니다.


알렉시우스 4세는 이를 이용해 4차 십자군에게 막대한 보상금을 약속하며 콘스탄티노플로 진격하게 됩니다.



베네치아군과 십자군은 치열한 접전 끝에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을 탈환한 알렉시우스 4세는 성문을 닫은 채 십자군에게 보상금을 줄 수 없다고 말을 바꿉니다.


십자군과 베네치아군은 다시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게 되고,


다시 시작된 전쟁에 시민들의 분노가 폭발하고 알렉시우스 4세는 알렉시우스 5세에 의해 암살당하게 됩니다.


콘스탄티누스는 함락되었으며 약탈과 학살이 시작됩니다.



더 이상 재기불능에 빠진 비잔티움은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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