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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부터 이어오던 프랑스와 영국의 대립이 전쟁으로 번지게 됩니다.



영토 분쟁과 왕위 계승 문제가 더해져 첨예한 대립이 표출되며 백년 전쟁이 시작됩니다.


봉건 영주들까지 합세하며 유럽 전역의 기사들이 전쟁이 참여하게 되고,


봉건 사회에서의 왕권 강화를 위한 왕과 봉건 영주들 사이의 갈등도 이어지게 됩니다. 


▶ 백년 전쟁의 시작 알아보기



백년 전쟁, 크레시 전투



출처 : wikipedia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는 가스코뉴 지방으로 진격합니다.


소식을 들은 프랑스의 필리프 6세 역시 프랑스 대군을 가스코뉴 지방으로 급파합니다.



프랑스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세였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를 횡단하여 플랑드르로 도망치게 됩니다.


프랑스 군은 에드워드 3세를 추격하게 되고 크레시에서 프랑스군과 잉글랜드군의 전투가 벌어지 됩니다.



당시 프랑스군은 다수의 용병 기사단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정식 기사 계급이 최신 장비로 중무장 하고 있었습니다.


반면 영국군은 농민으로 이루어진 평민 부대로 수적, 질적으로 상당한 열세에 있었습니다.



크레시의 언덕 위에 진을 친 영국군의 허름한 모습을 확인한 프랑스의 필리프 6세는,


지형이 불리해 전투 대형을 갖추어 공격해야 한다는 전략 담당관의 말을 무시한 채 공격에 돌입합니다.


선발대로 선 프랑스의 제노바 석궁병 역시 영국군을 무시하며 파비스 방패가 없는 채로 공격을 시작하고,


영국군은 장궁병을 내세워 롱보우로 제노바 석궁병을 제압하는데 성공합니다.


전세가 불리해지고 있었지만 통제되지 않는 프랑스 기사단은 전략이 없는 채로 언덕으로 돌진했으며,


팀플레이로 다져진 잉글랜드의 롱보우 앞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크레시 전투는 농민으로 구성된 평민 군대에게 봉건 기사단이 무너진 역사적 사건으로 유럽 사회에 큰 충격을 주게 되며, 


잉글랜드는 프랑스에게 대승을 거두게 됩니다.





프랑스 장 2세의 등장



출처 : wikipedia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승리한 잉글랜드는 칼레시로 진격하고 성을 포위합니다.


칼레시의 저항이 생각보다 격렬하여 전투가 길어지게 되었으며,


칼레의 시민 대표 7명이 굴욕을 당하는 조약을 맺고 1347년 잉글랜드는 칼레를 점령하게 됩니다.


로댕의 칼레의 시민 조각상이 칼레 전쟁 당시의 교섭하러 나오는 시민 대표를 조각한 것입니다. 



1350년 프랑스의 필리프 6세가 사망한 후 뒤를 이어 장 2세가 즉위합니다.


프랑스 왕으로 즉위한 장 2세는 스페인 출신의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였으나,


프랑스의 귀족 샤를르가 총사령관을 암살하는 일이 발생하고 샤를르를 투옥시킵니다.


장 2세는 샤를르를 석방하게 되고 샤를르는 잉글랜드의 흑태자 에드워드 편에 서게 됩니다. 



흑태자 에드워드는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3세의 아들로 후대에 매우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 인물입니다. 


잉글랜드의 흑태자 에드워드와 프랑스의 장 2세의 전투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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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 전쟁은 유럽의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을 말합니다.



백년 전쟁은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 사이의 프랑스 왕위 계승 문제가 발단이 됩니다.


프랑스와 잉글랜드의 귀족들은 혈연 관계로 복잡하게 얽혀 있었으며,


또한 영토 분쟁으로 인해 지속적인 갈등과 대립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1337년부터 1453년까지 약 100년 동안 끊이지 않았던 분쟁들을 통틀어 백년 전쟁이라 하며,


유럽 기사 계급 최고의 전성기이자 쇠퇴기로 접어드는 중요한 시점이기도 합니다.



백년 전쟁 시작 전의 상황



노르망디의 공작이었던 윌리엄 1세는 잉글랜드의 국왕이자 프랑스 국왕의 신하이기도 했습니다.


유럽은 중세 봉건제도잉글랜드의 국왕은 잉글랜드 왕국의 군주이자 프랑스 왕국의 신하라는 이중 지위를 갖고 있었습니다.


당시 스코틀랜드의 남부부터 피레네 산맥의 북부를 아우르는 잉글랜드 왕국은,


오늘날의 영국과 프랑스 북서부의 노르망디 지역을 영토로 하고 있었습니다.


잉글랜드는 노르망디 왕조가 성립되면서 프랑스의 영토를 일부분 차지하고 있었으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잉글랜드 국왕의 영토가 프랑스 국왕의 영토보다 많아지는 상황이 발생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는 분쟁이 끊이지 않게 됩니다.





백년 전쟁의 발단



출처 : wikipedia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끊임없는 영토 분쟁 중 가스코뉴 지방의 지배권에 분쟁이 생기게 됩니다.


가스코뉴는 프랑스내의 영국 영토로 유럽 최대의 포도주를 생산하는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당시 가스코뉴에서 생산되는 포도주로 발생되는 세금이 영국 전체의 세금보다 많았습니다.



또한 노르망디 북서부에 위치한 플랑드르 지방의 지배권에도 첨예한 갈등이 이어지게 됩니다.


플랑드르 지방은 영국이 양모를 수출하여 직조하는 직물 생산의 핵심지역이었습니다.


프랑스는 이에 플랑드르 지방에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였으며 플랑드르는 영국과의 동맹을 통해 프랑스를 견제하려 합니다.



이러한 다양한 문제들이 얽혀 백년 전쟁이 시작되게 됩니다. 



백년 전쟁의 시작



출처 : wikipedia



프랑스 카페왕조의 샤를 4세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게 됩니다.


당시 잉글랜드 왕국의 왕이었던 에드워드가 프랑스 카페왕조의 후계자임을 주장하고 나섭니다.


영토 분쟁에 후계자 갈등이 겹치며 백년 전쟁이 시작됩니다.



영국의 에드워드 3세는 플랑드르에 양모 공급을 중하며 프랑스 수출을 금지합니다.


플랑드르는 영국의 편에 서서 프랑스에 대항하게 됩니다.


플랑드르 곳곳에서 반란이 시작되며 플랑드르 백작이 퇴출되게 됩니다.



에드워드 3세는 이 틈을 타 안티오크에 상륙하고 프랑스 군을 피해 빈 도시 약탈을 시작합니다.


프랑스 군과 잉글랜드 군의 정규군이 정식으로 만나 전투를 벌이기 전까지,


지역 위주의 작은 전투가 벌어지며 전쟁의 열기는 고조되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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