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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후계자 옥타비아누스가 로마의 초대 황제로 등극합니다.



로마의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에게 존엄한 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합니다.


아우구스투스가 통치하던 시기부터 로마를 팍스 로마나 기간이라고 부르며,


기원전 27년부터 180년까지의 시대를 뜻합니다.


이전까지의 영토 확장 전쟁과 내전이 빈번하게 일어나던 시기와는 달리,


팍스 로마나 시대는 약 200년간의 로마 평화 시기를 의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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팍스 로마나 시대 이후



출처 : flickr



팍스 로마나 시대 이후 황실의 근위대가 황제를 결정할 수 있는 권력을 쥐게 됩니다.


약 50년 동안 20명이 넘는 황제가 교체되었으며 황제의 자리를 두고 입찰 경쟁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돈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황제가 될 수 있었으며 로마 내부는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외부의 이민족들이 로마를 침략하기 시작합니다.


동쪽에서는 사산조 페르시아가 북쪽에서는 슬라브족과 게르만족이 로마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로마 제국은 넓은 영토로 인해 이민족의 침략을 효율적으로 방어할 수 없었으며 이것은 가장 큰 문제이기도 했습니다.





동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의 시작





로마는 넓은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로마를 동로마와 서로마로 나누기로 결정합니다.



330년 로마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현재 터키이스탄불을 콘스탄티노플이라 명하고,


비잔티움 제국의 새로운 수도로 정하게 됩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동로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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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5년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동로마와 서로마를 구분합니다.


하지만 당시에는 동로마 제국 역시 로마 제국으로 불렸으며 주변의 나라들도 로마 제국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동로마 제국과 서로마 제국으로 구분하는 것은 편의상이며 서유럽 중심의 역사관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플은 동서 무역의 중심지로, 


그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단기간에 유럽 전체 국가 중 가장 부유한 도시로 성장하게 됩니다.


그에 반해 서로마 제국은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콘스탄티노플이 무섭게 성장하고 있었지만 로마 제국의 수도는 이탈리아 반도에 위치한 로마라는 인식으로 인해


서로마 제국으로의 이민족들의 침략이 끊이지 않습니다.


동로마 제국으로 침략하던 이민족들 역시 동로마 제국을 침략하지 않는 대가로 돈을 지불받고,


서로마로 진격해 서로마를 침략하게 됩니다.



군기마저 약해진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족을 용병으로 채용하고 있었는데


이것 역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하는 큰 이유가 됩니다.


로마군의 절반 가량이 용병군이었으며 점점 치솟는 용병들의 몸값은 로마 재정 파탄의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476년 서로마는 고트족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하게 됩니다.



과거 로마 제국의 영광은 사라지고 동로마 제국, 비잔티움 제국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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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두정치파는 필리피 전투에서 암살파 / 공화파에게 승리를 합니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로마 영토를 분할 통치하게 됩니다.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통치하게 된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의 로마 속령을 통치하게 됩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옥타비아누스가 차지한 곳은 작은 이탈리아 반도 뿐,


상대적으로 더 넓은 영토와 갈리아 군단, 곡물과 자원의 요충지인 이집트까지 차지한 안토니우스가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옥타비아누스의 치밀한 계략으로, 안토니우스를 로마 외곽으로 내보내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의 안토니우스 입지를 약화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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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 동맹과 파기



안토니우스의 부인 풀비아 사망 후 기원전 40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누이 옥타비아를 안토니우스에게 시집을 보냅니다.


이로 인해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확고한 동맹 관계가 형성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던 안토니우스는,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위해 이집트에 다녀오겠다고 한 뒤 옥타비아에게 결혼을 끝내자는 편지를 보냅니다.


혼인 동맹은 파기됩니다.



안토니우스의 실수



전략적으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보다 앞섰지만 안토니우스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클레오파트라와의 정식 결혼으로 로마 시민들의 인심을 잃어버리게 되며,


로마의 왕이 아닌 아집트의 왕이 되어 이집트 중심의 제국을 세우려 한다는 악소문이 퍼지게 됩니다.


아르메니아 왕국을 평정한 안토니우스는 개선식을 로마가 아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거행하며


로마인들의 반감을 사게 됩니다.



안토니우스의 편이었던 갈리아 사령관의 죽음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삼두 정치의 룰을 무시하고 


재빨리 자신의 사람을 갈리우스 사령관으로 임명해버립니다.   


또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 묻히고 싶다고 했다는 말을 퍼트리며 인심을 떨어뜨리는 소문을 퍼트립니다.



로마의 민심을 잃고 갈리아 군단의 지지를 잃어버린 안토니우스는 사면초가에 빠지게 됩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던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의 결전을 준비하고,


철저한 계획과 준비로 자신감이 상승한 옥타비아누스 역시 안토니우스와의 일전을 준비합니다.



악티움 해전



출처 : wikipedia



로마 내전 최후의 결전인 악티움 해전이 발발합니다.


안토니우스는 5단 노선, 8단 노선, 10단 노선의 대형 군선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를 해전 지휘관으로 임명했으며, 


아그리파는 대형 군선 대신 소형 군선을 전투에 투입하여 기동성과 민첩성으로 전투를 지휘합니다.


훈련도가 낮은 이집트 해군을 주축으로 출정한 안토니우스는, 


훈련도가 높고 완전 편대 함대를 이끈 아그리파의 해군과 그리스 북서부 악티움에서 만나게 됩니다.



아그리파는 안토니우스 해군의 좌우 보급로를 차단하며 항구를 봉쇄한 뒤,


빠른 리부르나를 이용하여 안토니우스 대형 군선의 노와 방향타를 파괴합니다.


또한 공성무기인 발리스타를 이용하여 불화살을 계속 발사하며 견제를 합니다.


전세가 불리해진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피신했지만 자신의 로마 병사를 두고 클레오파트라를 따라 도망간


안토니우스의 신망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고 로마에서의 권위와 신뢰를 잃은 안토니우스는 결국 자살을 선택합니다.


악티움 해전에서의 승리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공화정의 최고 권력자로 우뚝 서게 됩니다.



드디어 로마 제 1대 황제 옥타비아누스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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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유언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후계자가 됩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 당할 때 옥타비아누스는 18세였으며


일리리아의 아폴로니아에서 군사 훈련과 공부를 병행하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44년 5월 6일, 로마에 도착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집정관이자 카이사르의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였던 안토니우스를 만나게 됩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유언에 따른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카이사르 군단의 옥타비아누스 지지에 동맹을 선택하게 됩니다.


▶카이사르 유언장 확인하기





제 2차 삼두 정치



출처 : short history website



기원전 43년 10월,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제 2차 삼두 정치를 결성합니다.


사실상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이두 정치입니다.


3명의 집정관은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300명의 원로원 의원과 2,000명의 기사 계급 출신을


범법자로 규정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카이사르 암살파의 주요 인물인 브루투스 역시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 자격으로 도망치듯 로마를 떠나


그리스에서 암살 공모자 카시우스와 함께 군사를 모집하게 됩니다.


로마 서방 세력인 삼두정치파와 로마 동방 세력인 암살파 / 공화파의 내전이 시작됩니다.


▶1차 삼두정치 확인하기



로마 내전, 필리피 전투



출처 : wikimedia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삼두정치파,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암살파는 


각기 세력을 규합하고 군대를 정비하며 로마 내전을 준비합니다.


삼두정치파는 22개 군단, 보병 약 10만명, 기병 약 1만기를


암살파 / 공화파는 19개 군단, 보병 약 7만명, 기병 약 2만기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필리피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사이의 트라키아 지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군사 도로 에그나티아 가도에 위치하고 있어 요충지였으며,


도로 양쪽에 자리한 두 개의 언덕과 숲과 늪지로 이루어진 지리적 이점으로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습니다.


암살파가 필리피를 전투 지역으로 선정한 이유는 보급에 유리했고 장기전으로 가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양측은 모두 로마군이었기 때문에 전술, 지휘 등이 표준화 되어있어 전력은 막상막하였습니다.


1차 필리피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 군대를 급습해 승기를 잡은 브루투스는 안토니우스의 후방 부대까지 습격합니다.


브루투스의 활약으로 1차 필리피 전투는 암살파가 승리했지만 암살파의 장군 카시우스는 돌연 자살을 합니다.


장군 카시우스의 자살로 사기가 떨어진 암살파는 2차 전투에서 삼두 정치파에 패하게 되고 브루투스 역시 자살을 택합니다.



필리피 전투로 암살파 / 공화파를 물리친 삼두 정치파는 집정관들 사이의 새로운 영토 협정을 맺게 됩니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할 수 없듯이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본격적인 로마 패권 다툼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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