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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정치체제, 영토 등의 다양한 문제가 얽혀 30년 전쟁이 시작됩니다.



화약 무기의 등장으로 유럽 근세 전쟁의 판도가 변화하기 시작하며


시장과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기존의 카톨릭 체제와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황제의 독단으로 결정했던 정치, 경제,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이


의회의 승인을 거쳐야 하는 체제의 변화 역시 유럽 30년 전쟁 발단의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신교와 구교의 갈등



독일에서의 신교와 구교의 대립은 신교의 연합군과 구교의 제국군 사이의 전쟁으로 치닫게 됩니다.


마인츠, 트리어, 퀼른 지방은 카톨릭을 대변하던 구교의 3대 선제후가 다스리고 있었으며,


체코 프라하의 보헤미아, 라이프찌히의 작센 공국,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는 신교의 선제후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황제를 선거로 뽑았는데 선제후는 이 선거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선제후는 총 7명으로 신교 4명 구교 3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막강한 영향력을 행세하던 선제후는 구교와 신교로 양분된 채 갈등을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신교의 보헤미아 왕이 궐석하게 되며 구교 3명, 신교 3명으로 구성된 선제후들은


선제후 1자리인 보헤미아의 왕자리를 어느쪽 인사로 선정하느냐를 두고 크게 대립하게 됩니다.


이는 독일 내부의 문제를 넘어 주변의 신교 국가와 구교 국가들이 모두 개입하는 사건으로 번지게 됩니다.





보헤미아



출처 : wikipedia



당시 보헤미아는 구교의 탄압을 심하게 받고 있어 대중의 민심은 신교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에 기반을 두고 있던 신성로마제국은 유럽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산업이 발달하지 못하였으며 산업 자원 또한 풍부하지 않아, 


산업이 발달한 체코프라하나 스코다 지방 그리고 보헤미아에서 막대한 자금을 들여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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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교 입장에서는 보헤미아 지역을 신교에 빼앗길 수 없었으며,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 2세를 보헤미아의 왕으로 지원하여 왕으로 만들어 버리게 됩니다.


구교와 스페인의 지원을 얻어 왕이 된 페르디난트 2세는 신교를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당시 보헤미아의 의회는 신교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구교의 지원을 얻은 페르디난트와 갈등이 심화됩니다.


페르디난트 2세는 극렬히 저항하는 의회마저 탄압하게 되고 신교의 집회 자체마저 금지시키게 됩니다.



보헤미아 봉기, 프라하 투척사건



출처 : wikipedia



페르디난트 2세가 잠시 보헤미아를 떠나 있는 사이 신교의 봉기가 일어납니다.


신교파가 성으로 난입하여 구교파 장관 3명을 창밖으로 내던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극적으로 살아남은 구교파 장관들은 탈출에 성공하게 되고,


구교의 세력들은 프라하 투척사건으로 인해 분노가 끓어오르게 됩니다.


본격적인 신교와 구교의 대립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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