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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 투척 사건으로 구교와 신교의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됩니다.



정치, 경제, 사회의 전반적인 개혁과 변화로 인해 유럽은 혼란의 시기였으며,


특히 경제적 이익을 둘러싼 대립은 신교과 구교의 대립으로 대변되게 됩니다.


독일에서 발단이 되었지만 유럽 전체의 연합과 갈등으로 번져나가게 됩니다.


▶ 프라하 투척사건 알아보기



프리드리히 5세



출처 : wikipedia



프라하 투척사건으로 3명의 구교 장관들이 창밖으로 내던짐을 당하게 되고 간신히 살아남아 탈출하게 됩니다.


프라하 투척사건 당시 보헤미아의 왕이었던 페르디난트 2세는 보헤미아에 없었으며,


신교의 반란으로 보헤미아 왕의 자리는 다시 공석이 됩니다.



라인 팔츠 지역의 신교측 선제후였던 프리드리히 5세는 보헤미아를 노리고 있었는데,


보헤미아 신교 세력의 지원을 받아 공석이 된 보헤미아 왕으로 추대됩니다.


프리드리히 5세의 아내는 영국의 공주였는데 신교의 지지를 받고 있던 영국은, 


구교인 스페인과 로마신성제국을 견제하기 위해 팔츠와 혼인 동맹을 맺고 있었습니다.



당시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며 끊임없이 저항하고 있었습니다.


영국은 네덜란드의 바다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에 네덜란드가 스페인의 완전한 지배를 받게 된다면,


영국 역시 스페인의 위협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스페인이 네덜란드로 이동하는 중요 내륙 거점 지역인 팔츠 지역을 지원해야 했습니다.



보헤미아 역시 오랫동안 구교의 탄압을 받던 상황에서 신교인 팔츠와 영국에 의지하는 것이 이득이라 생각했고,


이러한 이유가 신교 세력인 팔츠의 프리드리히 5세를 보헤미아 왕으로 추대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프리드리히 5세가 보헤미아의 왕으로 추대된 지 이틀 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사망하고,


보헤미아의 왕이었던 페르디난트 2세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 등극하게 됩니다.





보헤미아-팔츠 전쟁, 백산 전투



출처 : wikipedia



신성로마제국의 새로운 황제이자 이전 보헤미아의 왕이었던 구교의 페르디난트 2세


팔츠의 왕이자 현재 보헤미아의 왕인 신교의 프리드리히 5세의 피할 수 없는 전쟁이 시작됩니다.



보헤미아의 팔츠군과 제국군의 독일 작센 바이에른군의 보헤미아-팔츠 전쟁의 서막이 열리게 되며,


팔츠를 노리는 스페인과 스페인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네덜란드의 전쟁 역시 서막이 열리게 됩니다.



1620년 프라하의 빌라 호라에서 구교와 신교의 전쟁인 백산 전투가 시작됩니다.


신교의 보헤미아 군대와 팔츠 군대, 만스펠트의 용병대, 영국 1개 연대의 1만 5천명의 병력과


구교의 작센 군대, 신성로마제국 군대, 동유럽 기사 용병대의 2만 5천명의 병력이 전투를 시작합니다.


구교는 창병과 총병이 섞인 테르시오 대형을 사용하여 신교를 압박했으며,


1622년 바덴의 프리드리히는 빔펜 전투에서 구교의 틸리와 격전을 벌이게 됩니다.



언덕 위에 진을 친 프리드리히는 마차를 이용해 방어벽을 쌓았지만,


강력한 구교의 테르시오 대형과 필드 캐논으로 신교를 격파합니다.


틸리는 프리드리히를 격파하고 신교 세력인 크리스티안군을 마인강에서 습격합니다.



신교 세력인 프리드리히와 크리스티안은 전쟁에서 패하고, 


용병 대장인 만스펠트를 따라 이동하다가 용병군의 계약이 만료되자 자연적으로 해산되었으며,


1622년 프리드리히의 신교 세력인 팔츠는 틸리에 의해 함락됩니다.



구교의 제국군은 보헤미아와 팔츠를 모두 점령하며 승리로 전쟁을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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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정치체제, 영토 등의 다양한 문제가 얽혀 30년 전쟁이 시작됩니다.



화약 무기의 등장으로 유럽 근세 전쟁의 판도가 변화하기 시작하며


시장과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기존의 카톨릭 체제와의 갈등이 시작됩니다.


황제의 독단으로 결정했던 정치, 경제, 사회의 다양한 문제들이


의회의 승인을 거쳐야 하는 체제의 변화 역시 유럽 30년 전쟁 발단의 원인으로 작용합니다.



신교와 구교의 갈등



독일에서의 신교와 구교의 대립은 신교의 연합군과 구교의 제국군 사이의 전쟁으로 치닫게 됩니다.


마인츠, 트리어, 퀼른 지방은 카톨릭을 대변하던 구교의 3대 선제후가 다스리고 있었으며,


체코 프라하의 보헤미아, 라이프찌히의 작센 공국, 베를린의 브란덴부르크는 신교의 선제후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은 황제를 선거로 뽑았는데 선제후는 이 선거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말합니다.


선제후는 총 7명으로 신교 4명 구교 3명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막강한 영향력을 행세하던 선제후는 구교와 신교로 양분된 채 갈등을 지속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신교의 보헤미아 왕이 궐석하게 되며 구교 3명, 신교 3명으로 구성된 선제후들은


선제후 1자리인 보헤미아의 왕자리를 어느쪽 인사로 선정하느냐를 두고 크게 대립하게 됩니다.


이는 독일 내부의 문제를 넘어 주변의 신교 국가와 구교 국가들이 모두 개입하는 사건으로 번지게 됩니다.





보헤미아



출처 : wikipedia



당시 보헤미아는 구교의 탄압을 심하게 받고 있어 대중의 민심은 신교쪽으로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에 기반을 두고 있던 신성로마제국은 유럽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는 산업이 발달하지 못하였으며 산업 자원 또한 풍부하지 않아, 


산업이 발달한 체코프라하나 스코다 지방 그리고 보헤미아에서 막대한 자금을 들여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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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교 입장에서는 보헤미아 지역을 신교에 빼앗길 수 없었으며,


합스부르크의 페르디난트 2세를 보헤미아의 왕으로 지원하여 왕으로 만들어 버리게 됩니다.


구교와 스페인의 지원을 얻어 왕이 된 페르디난트 2세는 신교를 탄압하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당시 보헤미아의 의회는 신교가 장악하고 있었으며 구교의 지원을 얻은 페르디난트와 갈등이 심화됩니다.


페르디난트 2세는 극렬히 저항하는 의회마저 탄압하게 되고 신교의 집회 자체마저 금지시키게 됩니다.



보헤미아 봉기, 프라하 투척사건



출처 : wikipedia



페르디난트 2세가 잠시 보헤미아를 떠나 있는 사이 신교의 봉기가 일어납니다.


신교파가 성으로 난입하여 구교파 장관 3명을 창밖으로 내던지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하지만 극적으로 살아남은 구교파 장관들은 탈출에 성공하게 되고,


구교의 세력들은 프라하 투척사건으로 인해 분노가 끓어오르게 됩니다.


본격적인 신교와 구교의 대립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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