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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두정치파는 필리피 전투에서 암살파 / 공화파에게 승리를 합니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로마 영토를 분할 통치하게 됩니다.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통치하게 된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의 로마 속령을 통치하게 됩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옥타비아누스가 차지한 곳은 작은 이탈리아 반도 뿐,


상대적으로 더 넓은 영토와 갈리아 군단, 곡물과 자원의 요충지인 이집트까지 차지한 안토니우스가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옥타비아누스의 치밀한 계략으로, 안토니우스를 로마 외곽으로 내보내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의 안토니우스 입지를 약화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옥타비아누스 확인하기





혼인 동맹과 파기



안토니우스의 부인 풀비아 사망 후 기원전 40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누이 옥타비아를 안토니우스에게 시집을 보냅니다.


이로 인해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확고한 동맹 관계가 형성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던 안토니우스는,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위해 이집트에 다녀오겠다고 한 뒤 옥타비아에게 결혼을 끝내자는 편지를 보냅니다.


혼인 동맹은 파기됩니다.



안토니우스의 실수



전략적으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보다 앞섰지만 안토니우스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클레오파트라와의 정식 결혼으로 로마 시민들의 인심을 잃어버리게 되며,


로마의 왕이 아닌 아집트의 왕이 되어 이집트 중심의 제국을 세우려 한다는 악소문이 퍼지게 됩니다.


아르메니아 왕국을 평정한 안토니우스는 개선식을 로마가 아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거행하며


로마인들의 반감을 사게 됩니다.



안토니우스의 편이었던 갈리아 사령관의 죽음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삼두 정치의 룰을 무시하고 


재빨리 자신의 사람을 갈리우스 사령관으로 임명해버립니다.   


또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 묻히고 싶다고 했다는 말을 퍼트리며 인심을 떨어뜨리는 소문을 퍼트립니다.



로마의 민심을 잃고 갈리아 군단의 지지를 잃어버린 안토니우스는 사면초가에 빠지게 됩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던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의 결전을 준비하고,


철저한 계획과 준비로 자신감이 상승한 옥타비아누스 역시 안토니우스와의 일전을 준비합니다.



악티움 해전



출처 : wikipedia



로마 내전 최후의 결전인 악티움 해전이 발발합니다.


안토니우스는 5단 노선, 8단 노선, 10단 노선의 대형 군선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를 해전 지휘관으로 임명했으며, 


아그리파는 대형 군선 대신 소형 군선을 전투에 투입하여 기동성과 민첩성으로 전투를 지휘합니다.


훈련도가 낮은 이집트 해군을 주축으로 출정한 안토니우스는, 


훈련도가 높고 완전 편대 함대를 이끈 아그리파의 해군과 그리스 북서부 악티움에서 만나게 됩니다.



아그리파는 안토니우스 해군의 좌우 보급로를 차단하며 항구를 봉쇄한 뒤,


빠른 리부르나를 이용하여 안토니우스 대형 군선의 노와 방향타를 파괴합니다.


또한 공성무기인 발리스타를 이용하여 불화살을 계속 발사하며 견제를 합니다.


전세가 불리해진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피신했지만 자신의 로마 병사를 두고 클레오파트라를 따라 도망간


안토니우스의 신망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고 로마에서의 권위와 신뢰를 잃은 안토니우스는 결국 자살을 선택합니다.


악티움 해전에서의 승리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공화정의 최고 권력자로 우뚝 서게 됩니다.



드디어 로마 제 1대 황제 옥타비아누스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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