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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에 걸친 갈리아 전쟁이 끝나게 됩니다.



카이사르(시저)는 기원전 58년 헬베티족 공격을 시작으로, 


기원전 51년 베르켄게토릭스의 갈리아 연합을 제압하면서 모든 갈리아 지역을 패권하에 넣습니다.  


카이사르의 군사적 명성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았으며, 카이사르는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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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삼두정치, 크라수스의 죽음



출처 : wikimedia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로 이루어진 로마 제 1대 삼두정치크라수스의 죽음으로 깨지게 됩니다.



로마 역사상 최대의 부호로 알려져 있는 크라수스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로마 내전 기간에 술라의 편에 서며 술라의 협력자로 공을 세우게 됩니다.


술라의 내전 승리로 크라수스는 마리우스파의 재산을 빼앗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집중합니다.


엄청난 재산을 모은 크라수스의 걸림돌은 군사적 업적의 부재였습니다.


로마의 공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군사적 업적이 필수였지만,


크라수스의 라이벌인 폼페이우스에 비해 군사적 업적이 없던 크라수스는 로마의 공직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했습니다.



기원전 55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를 뛰어 넘는 군사적 업적을 이루기 위해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전쟁을 지휘합니다.


파르티아는 오늘날 이란, 이라크, 터키 동부, 사우디 아라비아, 파키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파르티아 전쟁에서 크라수스는 패하게 되고 파르티아 왕에게 붙잡혀 죽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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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출처 : wikipedia



로마 제 1대 삼두정치를 이끌던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시저)의 딸과 혼인을 하며 카이사르와 동맹을 맺었지만,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중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가 사망하며 폼페이우스와의 동맹은 균열이 시작됩니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장인과 사위의 관계에서 라이벌이 됩니다.



기원전 50년, 갈리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카이사르는 기원전 49년에 있을 집정관 선거를 위해


북이탈리아 도시를 방문하며 선거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가 당시 로마에 있지 않고 루비콘 강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 부재 중 집정관 입후보를 원로원에 요청했지만


폼페이우스를 앞세운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원로원의 이러한 대우가 부당하다고 생각한 카이사르는 자신과 자신의 병사들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할것이라 선포합니다.


자신들의 총사령관인 카이사르를 위해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어 있던 병사들은 카이사르를 따르겠노라 선언합니다.



루비콘 강





로마 본토와 속주를 나누는 경계선인 이탈리아 북쪽의 루비콘 강은 원정을 나간 로마 군인들이 로마로 귀환할 시,


무장을 해제한 후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들어와야 했습니다.


로마군은 무장을 한 채로 루비콘 강을 건널 수 없는 불문율이 있었습니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 카이사르는 1개의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기 시작합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 강을 건너면 인간 세계가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나아가자.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우리의 명예를 더럽힌 적이 없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마리우스와 술라의 로마 내전 이후 또 다른 로마 내전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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