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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정 말기의 로마에서는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의 고모부였던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7번이나 집정관에 당선되었던,


로마 공화정의 장군이자 정치가였습니다. 


마리우스는 로마가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변화하는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마리우스의 라이벌이자 최대 정적이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한때 마리우스의 부하로 수많은 전쟁에 함께 참전하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유구르타 전쟁 이후 마리우스와 술라의 사이는 벌어지게 되며, 한쪽이 사라져야만 하는 비극으로 치닫게 됩니다.


▶마리우스와 술라 확인하기





벌족파와 민중파



 

 벌족파

 민중파

 대표 인물

 술라, 브루투스

 마리우스, 그라쿠스 형제

 정치

원로원의 전통적인 경로를 통해

정치적 목적을 추구

전통적인 방식 대신

유권자에게 직접 호소

 라틴어

 optimates

 populares



벌족파와 민중파의 대립은 카이사르의 가문에게도 매우 큰 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율리우스 씨족 가문의 귀족 집안이었던 카이사르가는 전통적으로 벌족파에 속해 있었지만,


카이사르의 고모부인 마리우스는 민중파의 대표 인물이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민중파에 속하게 되고,


술라가 로마 내전을 종식시키고 로마를 장악하였을 때 카이사르 역시 술라의 숙청 대상이 됩니다.



카이사르의 유산과 사제직, 아내의 지참금 덕분에 처형은 면하게 됩니다.


민중파였던 킨나의 딸과 결혼을 한 카이사르에게 술라는 이혼을 요구하지만, 


카이사르는 술라의 요구를 거절하고 소아시아 지방으로 도망치게 됩니다. 



카이사르의 성장





소아시아로 도망친 카이사르는 아시아 속주 미누키우스의 진영에 입대를 신청하고,


킬리키아 군단으로 이전하여 복무를 하게됩니다.


이곳에서 군 경력을 쌓은 카이사르는 기원전 78년 술라의 사망 소식을 듣고 로마로 돌아오게 됩니다.


23살의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합니다.


변호사는 로마 정계 진출의 유력한 수단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수사학을 완성하기 위해 기원전 75년 카이사르는 키케로의 스승이 있는 로도스섬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기원전 74년 카이사르는 비타니아 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한 외삼촌 아우렐리우스 코타를 찾아가고,


얼마 후 사망한 외삼촌의 뒤를 이어 카이사르가 총독으로 임명됩니다.


이후 회계감사관으로 선출되어 히스파니아로 이동하고, 히스파니아에서 돌아온 카이사르는


마리아스 부인의 제사 추모 연설을 하며 민중파의 거두로 등장하게 됩니다. 



기원전 65년, 35세의 나이로 안찰관에 선출되고 기원전 63년 최고 제사장에 당선됩니다.



기원전 60년, 로마 원로원에 불만을 품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크라수스를 끌어들여 삼두정치를 시작하게 됩니다.


일설에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사이가 좋지 않아, 


이를 중재하겠다는 명분으로 카이사르가 원로원을 설득시켜 삼두정치가 시작되었다고도 합니다.


민중파의 대표 카이사르, 강력한 군의 중심과 재력 폼페이우스, 기사 계급의 대표 크라수스가 손을 잡았으며


카이사르는 집정관에 당선되게 됩니다.


많은 빚을 지고 있던 카이사르는 빚의 해결과 입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 갈리아 원정을 준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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