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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정치와 종교, 로마법으로 세계를 3번 통일했다고 합니다.



서양 문명과 문화,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로마는 기독교 제국의 시작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는 현재 이탈리아의 수도로 고대에는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수백년 동안의 확장과 발전을 거듭하며 도시 국가를 탈피해 지중해를 정복하고 대제국으로 발전합니다.


로마 제국을 이야기할 때 수많은 정치가, 장군, 웅변가들이 등장하는데,


특히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빼 놓고는 로마 제국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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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성장



출처 : Ancient Origin / gaius marius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 제국의 기초를 쌓은 인물 중 한명입니다.


독일어의 황제를 지칭하는 카이저의 어원, 러시아 황제를 일컫는 차르의 어원이 모두


율리어스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에서의 승리로 지중해 패권을 장악하게 된 로마,


그리고 46년이 지난 기원전 100년 카이사르가 태어납니다.


카이사르의 가문은 귀족이었지만 로마 공화국의 고위직을 독점하는 가문은 아니었습니다.


카이사르의 할아버지인 가이우스는 시골 평민 출신이었던 마리우스를 사위로 삼게 되었는데,


이것이 카이사르 가문의 운명을 변화시킵니다.


마리우스는 부자였지만 시골 출신이었고 그에게는 가문의 이름이 부족했기에, 


카이사르가와의 혼인은 그에게도 도움이 되는 선택이었습니다.



이후 마리우스는 집정관직에 올라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고 유구르타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승승장구합니다.


마리우스의 공적과 재산을 등에 업은 카이사르가는 드디어 고위직으로의 진출이 열리게 됩니다. 


카이사르의 삼촌과 오촌 당숙이 집정관을 지냈으며 카이사르의 아버지 역시 법무관을 지냅니다.





마리우스와 술라



출처 : wikipedia



카이사르가와의 혼인과 마리우스 본인의 능력, 재산으로 로마에서 마리우스의 명성과 인기는 하늘을 치솟습니다.


카이사르가 태어나기 전인 기원전 107년, 당시 집정관이었던 마리우스는 재무관에 선출된 술라와 함께


누미디아 왕국에 파병되어 누미디아 정복 전쟁인 유구르타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기병을 이끈 술라는 누미디아 왕국과 누미디아의 연합군이었던 마우레타니아의 보병대를 격파하고,


누미디아의 본대를 함락시켰으며 누미디아의 수도까지 함락시키게 됩니다.


하지만 로마 포룸에 승리를 기원하는 조각이 새겨졌는데, 집정관인 마리우스는 묘사되지 않고 술라만 묘사되게 됩니다. 


나아가 세력가들이 다툼과 음모로 마리우스와 술라의 사이는 벌어지게 됩니다.



카이사르가 태어나기 한 해 전인 기원전 101년, 이탈리아 반도에 게르만족이 침략합니다.


마리우스의 밑에서 일했던 술라는 이 킴브리 전투에서 다른 집정관의 휘하에 속해 전투를 진행합니다.


마리우스와 술라의 사이가 매우 안 좋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게르만족과의 킴브리 전쟁에서 술라는 매우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게르만족을 격파하고 로마의 법무관으로 선출됩니다.


그 후 술라는 원로원 의원이 되며 마리우스를 적대하는 옵티마테스파의 일원이 됩니다.



기원전 91년 동맹시 전쟁이 시작되며 마리우스와 술라는 로마군을 지휘하게 되는데,


둘의 마지막 합동 작전인 마르시족과의 전투를 끝으로 로마의 패권을 잡기위한 영원한 라이벌로 각자의 길을 가게 됩니다.



카이사르의 고모부였던 마리우스의 영향으로 카이사르 가문은 성장했지만 


마리우스의 라이벌 술라의 최종 승리로 인해 카이사르 가문이 위기에 빠졌으며,


술라의 첫 부인이 율리우스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카이사르 가문이 숙청에서 살아남았던 점 등은


카이사르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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