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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15일 이전까지 부산을 점령하는 것이 북한군의 목표였습니다.



6월 25일 38도선에서 총 공세를 퍼부으며 남으로 진격한 북한군은,


뜻하지 않은 우리 국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치며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열세였지만 우리 국군은 끈질지게 저항하며 북한군을 저지합니다.


총 연장 240km의 낙동강 방어선 구축 후 총 반격을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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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동리 전투



출처 : flickr



1950년 8월 3일 경상남도 진동리에서 북괴군 제 6사단의 침공을 저지하며,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 이래 최대 전공을 세운 전투입니다.


진동리 전투의 승리는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크게 기여하며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얻습니다.



1950년 7월 말에서 8월 초 사이, 남한은 부산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지역을 북한군에 점령당하게 됩니다.


북한군은 부산으로 진격하기 위한 5개의 루트를 선정하고 부산으로 진격합니다.


포항에서 울산을 거쳐 부산으로 가는 루트, 경주에서 부산으로 가는 루트, 대구에서 부산으로 가는 루트,


삼랑진에서 부산으로 가는 루트, 마산에서 부산으로 가는 루트 총 5개의 루트가 있었습니다.


5가지의 루트중 4개의 루트는 파악을 하고 있었지만 마산에서 부산으로 들어오는 루트는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산에서 진격하던 북한군은 북괴군 6사단으로 그 실체는 팔로군 산하의 조선인 부대였습니다.


팔로군은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군과 싸운 중국 공산당의 주력 부대 중 하나입니다.


전투 경험이 풍부했던 북괴군 6사단을 김성은 중령이 지휘하던 김성은 부대가 막아서게 됩니다.


당시 대한민국 해병대는 아시아 최초의 정식 해병대로 미국 해병대가 그 수준을 보고 감탄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김성은 부대는 진동리에서 북괴군 6사단 정찰대대에 기습 공격을 감행하며,


171명의 적군을 사살, 포로 8명, 무기 110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며 승리합니다.



영천 전투



출처 : flickr



1950년 9월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뚫기 위한 총공세를 펼치게 됩니다.


9월 2일 북한군 15사단 주력이 영천으로, 12사단과 5사단은 포항과 안강으로 총 공격을 펼치게 됩니다.


영천은 지리적으로도 매우 중요했으며 대구, 포항으로 진격할 수 있는 교두보였습니다.


또한 당시 영천에는 유엔 지상군 총사령부와 대한민국 육군 본부, 미 8군 사령부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영천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사령부는 부산으로 이동합니다.



영천은 전쟁의 사활이 걸린 곳이었습니다.


우리 국군의 병력과 무기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치열한 혈전 속에 북한군에게 영천을 빼앗기게 됩니다.


일개 중대가 20여 명 남은 우리 국군은 배식이 와도 먹을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위기에 몰려 있었습니다.


영천을 재탈환하기 위해 화력을 총동원하였으며 공중 폭격을 퍼부으며 다시 주도권을 잡아나가게 됩니다.


영천이 뚫리게 되면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지게 되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기에


대한민국 육군은 필사의 반격을 펼치게 됩니다.


마침내 북한군을 포위한 우리 국군은 북한군을 패주시키며, 사살 3,700명, 포로 200명의 큰 승리를 이루게 됩니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준비 중에 있었지만 영천이 뚫린다면 인천상륙작전도 불가능했습니다.


영천 함락 당시, 맥아더 사령부는 워커 장군을 통해 정일권 장군에게,


10만 명 규모의 망명정부를 준비하고, 가장 믿을 수 있는 최정예 2개 사단을 준비시키라고 전달합니다.


영천이 함락된다면 대한민국을 포기하고 망명 정부를 세울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우리 군은 영천 전투의 승리로 대한민국을 지켜내며 북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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