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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지상군에 밀려 부산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북한군에 의해 점령됩니다.



최후의 방어선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펼쳐지고,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 이래 최대의 전공을 세운 진동리 전투


전쟁의 사활이 걸린 영천 전투 등에서 승리한 우리 국군은 반격을 개시합니다.


▶ 진동리, 영천 전투 확인하기

▶ 6.25 전쟁의 시작 알아보기





인천상륙작전 계획



출처 : wikipedia



낙동강 전선에서 우리 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합니다.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에 의해 서울이 점령되고, 1950년 6월 29일 참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직접 전선을 시찰하며 현장에서 답을 찾았던 맥아더 장군은 서울을 방문합니다. 



당시 일본에 있던 맥아더 장군은 수원 비행장을 통해 서울로 이동을 하였는데,


수원 비행장에 도착했을 당시 북한군의 공격으로 인해 화염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인천을 통한 측면 공격으로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군의 보급선을 차단해 병력을 분리한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1950년 7월 초 인천상륙작전의 초안이 수립됩니다.



인천상륙작전 반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은 무모한 상륙작전이라는 이유로 트루먼 대통령을 포함,


합동참모본부, 미 의회, 해병대의 반대에 부딪치게 됩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조수간만의 차가 큰 인천 앞다바는 상륙작전을 펼치기에 부적합했습니다.



상륙작전 후보지 중 하나였던 군산에서 작전을 수행하자는 참모들에게, 


맥아더 장군은 군산은 전략적 가치가 없다고 하며 인천으로의 상륙작전을 주장합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확률은 1/5,000로 그 성공 가능성이 희박했습니다.


인천은 상륙작전에 불합리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북한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동시에 낙동강 전선의 연합군과 한국군과의 포위전을 진행함으로써 북한군을 섬멸할 수 있다고 설득한 맥아더 장군은


9월 13일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합니다.


인천상륙작전 시도



출처 : wikipedia



1950년 7월 1차의 상륙작전이 시도됩니다.


미 육군 1개 사단과 해병대 1개 연대로 상륙작전을 준비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남진하던 북한군에 맞서기 위해 상륙작전에 투입하려던 미 제1기병사단을 포항으로 투입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1차 상륙작전인 블루하트 작전은 실패하게 됩니다.



미국 본토에 병력 증원을 요청한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재개하고 인디언헤드부대인 미 제2보병사단이 투입됩니다.


하지만 낙동강 전선이 불리하게 되면서 증원된 병력마저 낙동강 전선으로 투입이 됩니다.


2차 시도 역시 실패하게 됩니다.



1950년 9월 15일 3차 상륙작전인 작전명 크로마이트가 시도됩니다.


1개 해병 사단을 지원 받은 맥아더 장군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극동군사령부 제7사단을 동원하기로 결정합니다.


또한 대한민국 청년들을 병력으로 보충해 달라고 주한미군대사에게 요청합니다.


8,600명의 한국 청년들이 모집되었고 미 극동군사령부 신병교육대에서 기초 훈련을 받은 후 미 7사단에 편입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카투사 부대의 기원입니다.



인천상륙작전, 크로마이트



출처 : wikipedia



맥아더 장군의 명령으로 9월 13일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됩니다.


미국 226척, 한국 15척, 영국 12척 등 총 261척의 군함이 동원됩니다.


이틀간의 맹렬한 함포 사격 후, 9월 15일 유엔군과 우리 국군 해병대가 인천을 상륙한 후 서울로 진격합니다.



북한군은 약 2만의 병력으로 저항을 시도했지만 9월 20일 유엔군과 국군은 한강을 건너 서울에 침투합니다.


북한군이 대부분이 섬멸되고 서울에서 퇴각하며 9월 28일 서울을 다시 탈환하는데 성공합니다.


서울 탈환에 성공한 후 10월 1일, 육군 제 3사단은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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