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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고조 유방의 유언에 따라 흉노와의 평화가 이어집니다.



왕소군의 역할도 매우 큰 요인이었습니다.


한나라 7대 황제인 무제가 등극하면서 흉노전쟁의 불씨가 살아납니다.


1차와 2차에 걸친 흉노 전쟁으로 흉노의 세력은 북쪽으로 밀려나며 그 세력이 쇠퇴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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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 7대 황제 무제, 1차 흉노전쟁





한 고조 유방의 흉노전쟁 실패 이후 한나라는 흉노에 조공을 바치며 화친 정책을 이어나갑니다.



기원전 141년한 무제는 흉노족과의 조약을 파기하고 전쟁에 돌입합니다.


1차 흉노전쟁의 승리에는 위청과 곽거병이 있었습니다.



위청은 한 무제의 누나 평양공주의 노비 출신으로 목동이었습니다.


기생 출신인 위청의 누이 위자부가 한무제의 후궁으로 발탁되어 궁으로 들어나고 나아가 황후로 등극되며,


위자부는 위청을 흉노전쟁을 지휘할 장군으로 천거게 됩니다.


노비 출신이지만 무예에 능하고 겸손했던 위청은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그 능력을 인정받습니다.


위청은 흉노 세력을 몰아내고 오르도스 지역을 회복하는 큰 전과를 올립니다.


마지막 흉노전쟁인 7번째 원정에서는 흉노의 선우와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대승리를 거둡니다.



곽거병은 위청의 조카입니다.


1차 흉노전쟁 당시 총 7번의 흉노 정벌을 떠난 위청은,


전쟁 후반부 18세인 조카 곽거병을 출진시키고 곽거병은 천부적인 전투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곽거병의 능력을 알아본 한 무제는 곽거병을 장군으로 임명합니다.


위청의 원정 중 가장 큰 실패작이라 불리는 5차 원정부터 전쟁에 참여한 곽거병은 홀로 전과를 세웁니다.


한나라의 군대는 흉노족의 군대와의 싸움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했으며,


흉노족의 궁수기마부대를 당해낼 방도가 없었지만 몽골군의 전략과 기병 전술을 연구하고 습득한 곽거병은


유목민의 전략을 구현하며 기병을 이용해 적진을 돌파해 전과를 올립니다.


마지막 7차 원정에서는 기련산을 넘어 우루무치 일대까지 진출해 서쪽의 흉노를 섬멸하는 공을 세웁니다.





2차 흉노 전쟁





한 무제의 또 다른 부인이었던 이부인의 오빠 이광리가 장군으로 발탁됩니다.


한 무제는 이광리에게 흉노의 말보다 더 나은 말을 구해오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고,


이광리는 서역의 대완국이 산지인, 피 같은 땀을 흘리며 천리를 달린다는 명마 한혈마를 찾습니다.



한혈마를 얻기 위해 이광리에게 약 7만의 군사를 주어 대완국을 정벌하게한 한무제는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출정합니다.


기원전 91년 2차 흉노 마지막 전투에서 이광리는 포로가 되어 흉노에 투항하고 처형당하게 됩니다.



흉노의 분열과 멸망



출처 : wikimedia


한때 광활한 영토를 다스리며 주변국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흉노도 쇠퇴기에 접어듭니다.



한나라와의 거듭된 전쟁으로 흉노는 외몽골 북부까지 밀려나게 됩니다.


고비 사막을 사이에 두고 한나라와의 지리적 거리가 멀어진 흉노는 자연스레 약탈의 어려움으로 분열되고 소멸되게 됩니다.



또한 후한 말기에 남흉노는 대부분 남하하여 한족과 동화됩니다.



서쪽으로 이동한 흉노족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야기시켜 로마를 멸망하게 만든 훈족과의 연계성이 있는지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흉노의 이동과 실크로드의 건설은 동양과 서양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됩니다.


▶ 로마와 카이사르 확인하기



훈족과 흉노족을 같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며, 일부 흉노족이 훈족에 흡수되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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