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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는 해상 무역 왕국으로 번영하게 됩니다.



농업국이었던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전쟁에서는 승리하였지만,


실질적인 해상 주도권을 아테네에 빼앗긴 채 큰 이득을 가져가지는 못합니다.


당시 그리스 도시 국가 중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전운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동맹



출처 : wikipedia



아테네를 중심으로 페르시아의 재침략에 대비하는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결성되며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양분화 되기 시작합니다.


당시 해상의 1인자는 아테네, 육지의 1인자는 스파르타로 첨예한 갈등이 시작되던 중


해상의 2인자였던 코린토스와 육지의 2인자였던 아르고스, 그리스 패권 다툼에서 소외되었던 테베가


영향력을 차지하기 위해 전면으로 등장하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막이 열리게 됩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서막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국들은 물자나 자원, 자금 등을 집결시키게 됩니다.


페르시아의 재침공에 준비하게 되고 델로스 섬에 위탁된 자금을 관리하던 아테네가 


기금을 무단 전횡하고 동맹 국가들에 대한 법적, 정치적 간섭에 나서게 되며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아테네는 동맹 기금으로 아테네를 요새화 시키는 한편 아테네에 신전, 피레우스 항구, 성벽을 건설합니다.



이를 확인한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해명을 요청하게 되고 스파르타에 도착한 아테네의 사절단은


일종의 제국주의를 선언하며 살라미스 해전 당시의 스파르타 해군의 낮은 기여도를 언급하게 됩니다.


동맹 기금과 해상 무역을 기반으로 계속 성장하는 아테네에 대한 스파르타의 견제가 시작됩니다. 


해상의 2인자 코린토스와 아테네 동맹국 케르키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아테네가 동맹국인 케르키라를 지원하게 되고 스파르타는 코린토스를 지원하게 됩니다.



제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아테네의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가 지상전으로 공격할 시 아테네 성벽 안으로 이주하여 방어전을 펼치는 동시에,


아테네의 해군이 출정하여 스파르타의 해상을 봉쇄하는 작전을 세웁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아테네 성벽 안에 전염병이 돌면서 수많은 민간인과 군인의 25%가 죽게됩니다.



가장 결정적으로 페리클레스와 그의 두 아들까지 전염병으로 사망하게 되며 아테네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페리클레스 사망 이후 서서히 분열되된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선제 공격하게 되며 스팍테리아 전투가 발발합니다.


스팍테리아 전투에서 스파르타는 최초로 아테네에 패배하게 되며 200명의 전사자와 포로가 발생하게 됩니다.


양측의 막대한 손실과 피해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니키아스 평화조약을 맺고 6년간 지속됩니다.



제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염병과 전쟁으로 인해 큰 손실을 입은 아테네는 경제, 해군력 재건을 위해 주변 소도시들을 약탈하기 시작합니다.


아테네는 시칠리아, 이집트, 이오니아 지방에서 곡물을 수입하고 있었습니다.


시칠리아 지역에서 아테네 이민자들과 스파르타 이민자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며


아테네 이민자들은 아테네에 지원 요청을 하게 됩니다.


지중해에 걸친 아테네 제국을 건설하고 싶었던 알키비아데스의 야망은 실현되어 시칠리아 원정을 떠나게 됩니다.


당시 시칠리아 원정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알키비아데스와 니키아스는 앙숙의 관계였습니다.



출정 전날 아테네의 모든 헤르메스 신상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하고 유력한 용의자로 알키비아데스가 지목됩니다.


니키아스에 의해 계획된 공작이라는 알키비아데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미 출항을 한 알키비아데스를 아테네로 소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로 망명하게 됩니다.



스파르타로 망명한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를 멸망시킬 다양한 전술을 스파르타에게 전달해주게 됩니다.


시칠리아로 스파르타 원군을 보내 아테네 해군을 전멸 시켰으며,


아테네 인근의 데켈레이아를 점령하여 일 년 내내 아테네에 압박을 가해 농작물을 불태웠으며,


경제 압박과 해상 군대를 모두 잃은 아테네는 위기의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 왕비와의 스캔들로 사형 선고를 받고 페르시아로 망명하게 됩니다.



제 3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마지막 전쟁인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이 발발하게 됩니다.


시칠리아에서 스파르타에게 대패한 아테네는 총 병력을 동원하여 마지막 일격을 준비합니다.


당시 스파르타는 개혁을 단행하여 노예에 해당하는 최하층 계급에게까지 권한을 부여하며 전쟁에 참여시키게 됩니다.



페르시아로부터 해군 원조를 받아낸 스파르타는 에게해와 이오니아 지방에서 일어난


아테네에 대한 도시 국가들의 반란을 지원하고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을 승리하며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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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 연합과 페르시아 제국 사이에 일어난 전쟁입니다.



페르시아 전쟁은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는 영화 300의 배경으로도 유명합니다.


현대 스포츠 마라톤의 기원이 되었다고 알려진 마라톤 전투 역시 페르시아 전쟁의 전투입니다.


페르시아는 제국이라 불릴 정도로 광활한 영토와 막강한 군사력,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쟁에서 그리스 연합 도시 국가에 패하게 되며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페르시아 제국



출처 : wikimedia commons



페르시아 제국은 오늘날 이란의 영토를 근거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중동과 터키,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인도까지 진출했던 대제국입니다.


페르시아의 어원은 고대 이란계 부족 파르스와 이들이 살던 이란 남서부 지역 파르샤에서 유래했습니다.


로마 제국보다도 500년 앞선 세계 최초의 제국이 페르시아 제국입니다.


광활한 영토와 다양한 민족을 아우르기 위해 왕의 눈, 왕의 길, 왕의 귀의 통치 방법을 사용합니다.


기원전 5세기, 다리우스 1세에 의해 건설된 고대의 고속도로 왕의 길은 페르시아 왕도로도 불립니다.


약 2,700km의 왕의 길에는 중간 중간 역참을 설치 하였으며 이 길을 통해 이동한 관료들이 왕의 눈과 귀가 됩니다.


왕의 허가증을 지닌 전령은 왕의 길을 통해 약 2주 이내에 제국의 전역에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왕의 길은 제국의 소식을 전하는 동시에 감시와 스파이 활동을 함께 수행하는 고대 최고의 교통망이자 통신망입니다.


광활한 영토와 다양한 민족을 아우르기 위해 개방적인 정책을 사용하며 제국으로의 발전을 이루어 냅니다.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



오늘날 터키와 시리아 주변의 소아시아 이오니아 지방에서 페르시아에 대한 반란이 일어납니다.


당시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은 페르시아가 임명한 통치자를 축출하면서 그리스 본토의 도시 국가들로 지원을 받습니다.


그리스 도시 국가인 아테네와 에레트리아 군대의 지원으로 이오니아 지방의 도시 국가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북서부 지역의 최대 거점 도시 사르디스를 습격하여 페르시아의 신전과 도시를 불태워 버립니다.


반란을 제압한 페르시아 제국 다리우스 1세는 배후인 그리스를 침공할 계획을 세웁니다.



마라톤 전투



출처 : wikimedia commons



페르시아의 1차 침공은 폭풍을 만나 해군 선단이 몰살당하면서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본격적인 전투는 2차 침공인 마라톤 전투로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그리스 도시 국가의 맹주였던 아테네는 페르시아 침공 소식에 스파르타에 원군 요청을 하지만,


당시 만월의 종교 축제 기간이었던 스파르타는 원군 요청을 거절하면서 아테네는 홀로 페르시아군을 맞게 됩니다.


마라톤 평야에 상륙한 페르시아군을 격파하고 급하게 아테네로 돌아와 페르시아 함대를 막아내며 전투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페르시아 재 침공



출처 : wikimedia commons



마라톤 전투 이후 10년이 지나고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를 다시 침공하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 300의 배경인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의 왕 레오디나스와 300명의 스파르타 병사는 모두 전사하게 됩니다.


에피알테스라는 그리스인이 페르시아 대군에게 테르모필레 협곡을 우회하는 샛길을 알려주게 되고


페르시아 군대는 아테네로 진격하여 아테네에 입성하게 됩니다.


페르시아 군대가 아테네에 입성했을때 아테네는 이미 비어있었으며,


아테네의 명장 테미스토클레스의 작전으로 시민들과 병력은 살라미스 섬으로 이주해 있었습니다.



세계 4대 해전, 살라미스 해전



출처 : wikimedia commons



마라톤 전투에 참가했던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리스군이 승리를 만끽하고 있을때,


앞으로 페르시아군의 재침공이 있다면 육지에 상륙하기전에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해군 양성을 준비합니다.


막대한 자금력이 필요했던 해군 양성에 그리스 사람들은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아테네의 라우레이온에서 대규모 은 광산이 발견되면서, 


그리스인 설득에 성공한 테미스토클레스는 자금을 확보하여 해군 양성에 돌입하게 됩니다.


아테네를 그리스 제일의 해군 국가로 만들어 이후 해외 무역과 식민지 확보 등 아테네 번영의 토대를 마련하게 됩니다.


페르시아의 군선은 그리스의 갤리선에 의해 괴멸당하게 되고 살라미스 해전은 그리스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살라미스 해전의 다음해, 스파르타 레오디나스 왕의 조카인 파우사니아스 왕이 지휘하는 5만의 그리스 연합군이


플라타이아 평원에서 페르시아 군을 격파하며 에게 해에서의 페르시아 영향력은 사라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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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세계대전에 이어 얼마 지나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합니다.



다양한 사건들과 문제들이 얽혀있어 정확히 어떠한 한 사건으로 발발했다고 규정짓기는 어렵습니다.


한가지 중요한 원인으로는 1930년대의 세계 대공황을 들 수 있습니다.


세계 대공황은 각 나라의 민족주의를 강화시켰으며, 


자국의 이익과 산업 발전, 경제 발전, 시장 보호 등의 자국 보호 정책을 앞세워 첨예한 대립이 시작됩니다. 



독일의 상황



출처 : wikipedia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된 독일은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부담해야 했으며,


독일 민족 수백만명이 다른 나라로 분리되었고, 영토가 축소 되는 등 위기를 맞게됩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후 1919년부터 독일에 세워진 바이마르 공화국은 나라의 재건에 총력을 기울입니다.


적극적인 전후 복구책을 실시한 바이마르 공화국은 화폐, 철도, 세제의 개혁을 성공시키며 재건의 기틀을 마련합니다.


뛰어난 기술을 바탕으로 바이마르 공화국은 점차 경제 부흥을 이루고 세계 각국의 자본을 유치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바이마르 공화국은 빼앗긴 영토 회복, 주권 회복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게 되며 다시금 힘을 기르게 됩니다.


급격한 경제 성장으로 인해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는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이 시작됩니다.


대공황으로 인한 블록 경제, 제1차 세계대전 패전국이라는 핍박이 겹치며 민족주의가 강력히 떠오르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



출처 : wikipedia



히틀러와 나치의 등장은 제2차 세계대전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습니다.


기존의 영토 회복을 명분으로 앞세운 독일은 독일인의 생활권 확대라는 야심을 갖고 전쟁을 일으키게 됩니다.


1938년 3월 독일군은 오스트리아 빈으로 진격했으며 무저항 입성을 하며 오스트리아를 병합하게 됩니다.


같은 해에 이루어진 뮌헨 회담에서 체코 주데텐란트가 독일에 합병되게 됩니다.


당시 영국, 프랑스, 미국은 전쟁의 재발을 방지하려 노력중이었으며,


전쟁으로 독일의 부흥을 다시 꿈꾸고 있던 히틀러는 1933년부터 준비해 온 폴란드 회랑을 1939년 침공하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됨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진행



출처 : wikipedia



1939년 8월 모스크바에서 독일과 소련의 불가침 조약이 맺어집니다.


1920년 폴란드에게 일부 영토를 잃은 소련은 독일과의 불가침 조약을 통해,


핀란드, 폴란드, 루마니아, 리투아니아, 라트비아, 에스토니아에 대해 영토와 정치적 지배를 분할하는 내용에 합의합니다.


1939년 9월 1일 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게 전쟁 중지를 경고했지만


독일은 이를 거부하며, 9월 3일 영국과 프랑스는 독일에게 선전 포고를 하게 되며 전쟁이 시작됩니다.


폴란드를 2주 만에 함락시킨 독일은 프랑스로 진군합니다.


프랑스에는 당시 난공불락의 요새라 불리던 마지노선이 있었습니다.


벨기에의 아르덴 숲을 통과한 독일군은 프랑스군의 허를 찌르며 성공적으로 마지노선을 뚫고 프랑스 파리로 입성합니다.


파리로 입성한 독일군은 파리 점령 8일 후 프랑스의 항복을 받아냅니다.


1941년 6월 22일 슬라브족의 정복과 동방 진출을 목적으로 한 히틀러는 독소 불가침조약을 깨며 소련으로 진군합니다.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까지 맹렬히 진군했지만 독일군은 결국 소련군의 저항에 밀려 후퇴하게 됩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결



출처 : wikimedia



1944년 미국이 본격적으로 전쟁에 가세하며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시작으로 독일군을 몰아부치게 됩니다.


1945년 4월 베를린 공방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이 나며 히틀러는 지하 벙커에서 자살을 하게 되고,


1945년 8월 일본이 미국에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며 제2차 세계대전은 끝이 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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