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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포에니 전쟁은 한니발 전쟁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1차 포에니 전쟁에서 패한 카르타고는 하밀카르 바르카를 앞세워


히스파니아, 오늘날의 스페인 지역을 식민지화 시키며 최정예 군대를 양성하기 시작합니다.


아버지 하밀카르 바르카가 죽고 아들인 한니발이 뒤를 이어 로마 정벌에 나서게 됩니다.


역사상 로마 최고의 장군 중 한명으로 손꼽하는 스키피오와 한니발의 전투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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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포에니 전쟁의 시작



출처 : wikimedia



기원전 221년, 26세의 한니발은 카르타고의 총 사령관으로 임명됩니다.


기원전 219년 한니발은 이베리아 반도 동쪽의 사군툼을 침공합니다.


로마의 동맹국이었던 사군툼은 카르타고군의 철수를 요청했지만 한니발은 이를 거절했으며, 


로마는 카르타고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며 2차 포에니 전쟁이 시작됩니다.



로마가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어 한니발은 바다로 로마를 침공할 수 없었습니다.


한니발은 역사상 가장 무모한 전술이라고 평을 받는 새로운 전술을 사용하게 됩니다.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로 진격하는 작전이었습니다.


수적으로 로마군에 열세임을 알고 있던 한니발은 본토를 직접 공격한다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한니발은 로마의 정적인 갈리아족을 포섭해 함께 로마와 싸우고, 


과거 로마에 정복 당한 이탈리아 남부 도시들이 로마에 반기를 들어 싸우게 만든다면 로마 함락이 가능하다고 판단합니다. 






한니발, 피레네 산맥을 넘어 갈리아족을 정벌하다.



출처 : wikipedia



기원전 218년 한니발은 9만의 보병과 1만 2천의 기병, 코끼리 37마리를 이끌고 피레네 산맥을 넘기 시작합니다.


코끼리는 고대에서부터 전투용으로 많이 사용되었는데, 오늘날으로 따지면 탱크의 역할을 했습니다.


약 1,000km의 행군 끝에 한니발은 프랑스의 론강에 도착하게 됩니다.



론강의 폭은 150m에서 200m정도로 대군을 이끌고 강을 건너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또한 강 건너에는 카르타고에 순응하지 않는 대규모의 갈리아군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카르타고의 기술자들은 군대와 군수 물품 등을 운반할 수 있는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뗏목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똇목의 길이는 60m, 폭은 15m 정도였습니다. 또한 코끼리의 심리적 안정도 생각해야 했습니다.


뗏목 위에 풀과 흙 등을 덮어 코끼리들이 땅 위에 서있는 것처럼 느끼게 했습니다.


강 건너에서 이를 바라보던 갈리아족은 위협을 느끼고 도망가기 바빴으며 한니발은 9일만에 갈리아를 정복합니다.


곳곳의 갈리아군을 포섭하고 진압하며 알프스를 넘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한니발, 알프스 산맥을 넘어 로마 본토로 입성하다.



출처 : wikimedia



한니발의 군대는 진격을 멈추지 않았고 알프스 산기슭에 도착하게 됩니다.


산을 오르면서 거대한 바위산을 만난 군대는 산을 넘어가기 보다 산을 관통하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바위산에 균열을 만들고 주변의 나무를 모아 바위산 주변을 둘러싼 후 나무를 태웁니다.


뜨거운 열기에 바위가 달아오르게 되고 균열 사이로 뜨거운 식초를 부어 바위를 녹이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알프스를 넘었을 때, 한니발 원정대의 병력은 큰 손실을 입게 됩니다.


보병은 2만여명이 남아있었으며 기병은 약 6천명, 코끼리는 1마리가 남게됩니다.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에 도착한 한니발은 타키누스 전투에서 로마군을 격파하고,


이탈리아 중부의 트라시메네호 전투에서 로마군을 연달아 격파하며, 이탈리아 남부로 이동합니다.



조속히 전쟁을 마무리 짓기 원했던 로마 시만들의 희망에 따라, 


로마는 대군을 이끌고 한니발이 머물고 있던 칸나에로 진격합니다.


현대에도 포위 섬멸전의 교본으로 남아 각국 사관학교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칸나에 전투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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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포에니 전쟁의 패배로 카르타고는 시칠리아의 주도권을 상실합니다.



1차 포에니 전쟁의 패배로 로마에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지불하게 되었고, 


전쟁에 참가한 다른 나라의 용병들의 급료도 지불해야 했습니다.


또한 코르시카와 사르데냐까지 로마에 양여하게 됩니다.


일설에는 카르타고페르시아만큼 돈이 많았다고 하는데, 


전쟁 배상금을 국고에서 줄 정도로 전쟁 배상금으로 인한 경제 악화는 없었다고 합니다.



하밀카르 바르카의 에스파냐 진출



출처 : wikipedia



육군 양성의 필요성을 느낀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는 기원전 237년 스페인 점령을 위해 출정합니다.


약 9년여간의 치열한 교전 끝에 하밀카르는 원주민 부족들의 항복을 받아내고 스페인 점령을 성공합니다.


부유했던 카르타고는 전쟁 발발시 용병을 고용하는 방법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용병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판단한 하밀카르는 스페인을 정벌하고 최고의 군대를 양성하기 시작합니다.


에브로 강의 남쪽 지역이 전부 카르타고의 지배를 받게 됩니다.



하지만 기원전 228년 원주민의 반란을 진압하던 중 하밀카르는 전사하게 됩니다.


일설에 따르면 하밀카르에 위협을 느낀 로마가 자객을 보내 암살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하밀카르의 전사는 카르타고에게 큰 충격을 안겨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카르타고 정복 전쟁의 새로운 장이 열리는 순간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하밀카르의 아들 한니발의 등장입니다.





한니발



출처 : wikipedia



하밀카르는 한니발의 나이 9세 때 스페인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한니발이 에스파냐로 함께 가고 싶다고 하밀카르에게 이야기했고 하밀카르는 9살의 어린 아들 한니발을 


바알 신전으로 데리고가 평생 로마를 적으로 삼을 것을 서약 시킨뒤에야 허락했다고 합니다.


평생 로마를 적으로 삼을 것을 맹세한 한니발은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로마에 대한 증오심을 배웁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은 그리스와 로마의 영웅 50인을 담은 책입니다.


이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의 주인공이 바로 로마의 가장 위협적인 적이었던 한니발입니다.


비록 적이었지만 로마도 인정할 만큼 위대한 명장이었습니다.


위대한 장군으로 평가받는 또 다른 인물 나폴레옹 보다도 2,000년 앞서 알프스 산맥을 넘었으며,


알렉산드로스 / 알렉산더 대왕과 피로스를 존경하여 그들의 병법을 연구하고 공부한 고대 최고의 장군들 중 한명입니다.



2차 포에니 전쟁한니발 전쟁이라고 불릴 정도로 한니발의 뛰어는 전술과 전략은 후대에도 전해집니다.


기원전 218년 여름, 28살의 젊은 장군 한니발은 약 10만여명의 군대를 이끌고 로마 본토를 정복하기 위해 출정합니다.


알프스를 넘었을 때는 기병 6천, 보병 2만, 코끼리 1마리로 병력이 크게 줄었지만,


갈리아족을 포섭하여 약 5만의 군사를 모은 한니발은 칸나에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며 로마를 압박합니다.


무려 15년 동안이나 로마 본국에서 로마를 압박하였지만, 로마의 명장 스키피오의 북아프리카 본토 공격으로


본국으로 돌아오게 되고 자마 전투에서 스키피오에게 패하면서 2차 포에니 전쟁은 끝이 나게 됩니다.


이후 소아시아로 망명하게 되고, 끝내 독을 마시고 자살하게 됩니다.



1차 포에니 전쟁 확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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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3세기경 로마의 세력은 급속도로 성장합니다.



로마는 카르타고가 건설한 지중해 무역 도시들을 탐내고 있었습니다.


완전 농업 국가였던 스파르타와는 달리 로마는 무역도 하는 농업 국가였습니다.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점차 팽창하던 로마는 부를 축적하기 위해 바다로 눈을 돌리게 되고,


이러한 로마에게 당시 해상의 1인자였던 카르타고는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또한 카르타고는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영토 확장과 제국의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해상의 1인자 카르타고와 육상의 1인자 로마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포에니 어원



포에니의 어원은 페니키아입니다.


오늘날 소아시아에서 성장한 페니키아인들이 북아프리카로 이주하며 카르타고를 건설했고,


카르타고인들의 뿌리는 페니키아였기 때문에, 


로마인들이 페니키아인을 부르던 포에니의 이름을 따서 포에니 전쟁으로 불리게 됩니다.





1차 포에니 전쟁의 이유



출처 : wikipedia



시칠리아는 카르타고의 무역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곳이었습니다.


시칠리아 섬은 상선의 항로상 중앙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지중해 무역의 중심 항로를 확보하려면 시칠리아 섬을 점령해야만 했습니다.


카르타고의 엄청난 부를 확인한 로마인들은 시칠리아 섬을 눈독들이고 있었습니다.


당시 시칠리아 섬은 완전한 카르타고의 지배에 있지 않았으며 로마인과 카르타고인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를 점령해야하는 땅, 로마의 심장을 노리는 칼로 생각했습니다.


무역을 발전시키고 해상으로 나가려면 카르타고를 반드시 멸망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시칠리아 섬은 내전에 휩싸여 있었으며, 라틴계와 그리스계인들에 의해 전쟁이 끊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시칠리아 섬의 도시 국가인 메시나는 가장 세력이 강력했던 시라쿠스의 공격을 받고 있었으며,


메시나는 카르타고와 로마에 원군 요청을 하게 됩니다.



1차 포에니 전쟁



출처 : wikimedia



메시나는 거리가 먼 카르타고 보다는 확장중이었던 로마에게 구원 요청을 하게 되었고 로마는 구원병을 파견합니다.


메시나는 카르타고에게도 구원 요청을 하였지만, 카르타고에서 먼저 군대를 파견할 경우 시칠리아 섬에서의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려워짐을 파악한 로마는 카르타고를 견제하기 위해 일찍 구원병을 파견합니다.


군대를 메시나로 파견한 로마는 메시나를 로마의 세력하에 두었고 시라쿠스까지 귀속시켜,


시칠리아 섬의 동부와 이탈리아 남부를 차지하게 됩니다.


시칠리아 섬에서의 영향력이 줄게 된 카르타고는 대규모의 병력을 시칠리아에 파견하게 됩니다.


기원전 264년 1차 포에니 전쟁의 시작입니다.



1차 포에니 전쟁, 하밀카르 바르카와 스키피오



출처 : flickr



17년 동안의 교착 상태카르타고의 명장 하밀카르 바르카가 등장하면서 끝이나게 됩니다.


하밀카르 바르카는 카르타고의 첫 번째 위대한 장군입니다. 한니발의 아버지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형태의 막강한 전함인 카르타고의 5단 전함을 앞세워 시칠리아 본토를 휘젓고 다닙니다.


카르타고 5단 전함의 가장 큰 무기는 상대 전함을 파괴시키는 거대한 청동 충각이었습니다.


길이 36m, 폭 3m-5m, 탑승 인원 420명, 무게 100톤의 카르타고 5단 전함은 기동성 또한 매우 뛰어났습니다.


또한 전함을 만들어내는 속도도 매우 빨라 카르타고의 배가 침몰해도 곧바로 다른 전함이 투입될 수 있었습니다.



고전을 면치 못하던 로마는, 침몰한 카르타고의 전함을 노획하여 재조립하고,


그와 유사한 수십척의 전함을 만들어내게 됩니다.


카르타고의 전함과 같지는 않았지만 로마 해군 전력 상승에 큰 기여를 하게됩니다.


기원전 241년 카르타고와 로마는 시칠리아 서부 연안의 에가디 제도에서 결전을 치루게 됩니다.


로마 해군 사령관 스키피오가 포로로 잡히지만, 그 뒤를 이어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두일리우스는,


까마귀라 불리는 코르부스 잔교를 탑재하여 전투에 나서게 됩니다.


포로로 잡힌 스키피오는 2차 포에니 전투에서 한니발을 물리치고 로마의 승리를 이끈 스키피오 장군의 아버지입니다.



카르타고 전함과 거리를 가까이 유지하여 코르부스 잔교를 배와 배 사이에 설치하고 백병전을 치룬 로마군의 승리,


카르타고군 3만여 명이 포로로 잡히고 하밀카르 바르카가 퇴각하게 되며 로마군의 승리로 전쟁이 끝나게 됩니다.


이후 막대한 전쟁 배상금을 로마에 지불하게 되고 지중해의 섬을 뺴앗기는 등 패권에서 밀렸지만,


카르타고는 2차 포에니 전쟁을 준비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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