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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와 권력과 야망으로 건설된 제국 카르타고는 600년간 지중해를 지배합니다.



카르타고인들의 뛰어난 기술력과 상업술은 이후 인류의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고대 세계 최고의 전함과 항구 시설은 카르타고를 대표하는 기술의 집약체입니다.


카르타고의 전함은 속도가 매우 빠른것으로 유명했고,


카르타고의 전함은 주변 여러 나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최고의 제국 중 하나로 불리는 로마의 등장으로 지중해의 패권을 둔 전쟁이 시작됩니다.



카르타고



출처 : wikimedia



학창 시절 우리는 카르타고에 대해 들어 본 경험이 있지만 정확히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합니다.


카르타고는 오늘날 북아프리카의 튀지지 북쪽 해안 도시인 튀니스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4세기경, 강력한 제국 카르타고는 최강의 해군력으로 지중해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카르타고의 기원은 티레라는 도시로 티레의 페니키아인들의 이주로 인해 건설되었다고 합니다.


한 때 번영했던 도시 티레는 권력 투쟁으로 인해 도시가 피폐해지게 되면서 주민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 시작합니다.


티레는 오늘날의 소아시아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이스라엘 근교에 있었다고 합니다.



티레의 왕 무토의 공주였던 디도는 그의 남편이 오빠인 피그말리온에 의해 살해당하자,


페니키아인들을 이끌고 지중해를 건너 북아프리카로 피신하게 됩니다.


원주민들에게 토지를 얻게 된 디도 공주는 비르사 언덕 근처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게 됩니다.


기원전 9세기, 디도가 새로 세운 카르타고는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합니다.


육지보다는 바다로 눈을 돌린 카르타고는 실리적이고 합리적이며 실용적인 개척자였습니다.


무역로를 개척해 빠르게 성장한 카르타고는 급속하게 국제적인 도시로 발전하게 됩니다.


이후 200년 동안 눈부신 발전을 이룬 카르타고는 이비사, 사르디니아, 누미디아 등의 식민지를 개척하게 됩니다.


기원전 7세기, 카르타고는 무역 네트워크를 활용해 엄청난 부를 축적합니다.


북아프리카와 지중해의 상업, 문화의 중심지가 됩니다.





카르타고의 기술



출처 : wikimedia



카르타고 이전의 건축물들은 대부분 신을 위한 건축물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카르타고는 주택의 건설에 집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를 찾아 카르타고로 이주하기 시작합니다.


도시 건축가들은 이들이 살 집을 건축하기 위해 고심했으며 도시의 테두리 안에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들을 위해


매우 획기적인 건축물의 형태를 고안해냅니다.


이들을 모두 수용할 수 있는 효율적인 건축물이 필요했고, 오늘날의 아파트 형태의 건축물을 짓기 시작합니다.


아파트 건축의 재료는 튀니스만의 채석장에서 석회암을 공급받아 사용합니다.



대도시로 성장한 카르타고는 원활한 용수 공급에 대해서도 뛰어난 기술을 발휘합니다.


점토와 재, 계란 껍질을 사용하여 만든 수조는 완벽한 방수 시설을 갖춘 최고의 용수 시설물이 됩니다.


수조에 연결된 파이프를 통해서 각 가정으로 물이 공급됩니다.


또한 욕실에는 욕조와 세면대, 샤워 시설을 갖추게 됩니다.


수도와 하수 시설까지 갖춘 카르타고는 대규모 도시 국가로 부상하게 됩니다.



뛰어난 항해술과 조선업 또한 카르타고를 부강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로 작용합니다.


기원전 6세기, 카르타고의 탐험가 한노는 카르타고의 식민지 개척과 무역로 확장을 위해 항해를 시작합니다.


기원전 520년, 3,000명의 사공이 60척의 배를 이끌고 지브롤터 해협을 지나 항해를 시작합니다.


개척한 식민지에 카르타고인을 이주시키고 식민지를 장악하여 그 곳의 자원을 확보하게 됩니다.


카르타고는 해상을 장악해 부와 권력을 축적했고, 사르디니아와 발레아레스 제도를 영향력 아래 두게 됩니다.




카르타고 기술력의 절정이라고 할 수 있는 항구 시설은 카르타고의 심장이라 불렸습니다.


카르타고의 항구는 카르타고의 해군과 해상 무역의 중심이었습니다.


항구의 입구는 폭이 21m로 강철 사슬을 이용해 폐쇄가 가능한 구조였습니다.


세상의 모든 물건이 모인다고 할 정도로 카르타고의 항구는 상인들과 상선으로 분주했습니다.


안쪽으로는 군함을 위해 설계된 둥근 모양의 정박지가 있었습니다.


총 220척의 군함을 수용할 수 있는 엄청난 규모를 자랑합니다.



200년간 지중해를 장악하던 카르타고는 지중해 건너의 강력한 라이벌의 등장으로 지중해를 둔 패권 다툼이 시작됩니다.


강력한 라이벌은 로마 제국으로 총 3차에 걸친 포에니 전쟁의 서막이 열리게 됩니다.


육지의 최강자 로마와 해상의 최강자 카르타고는 결국 맞붙을수 밖에 없는 운명에 휩싸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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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암살 된 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로 진격합니다.



필리포스 2세의 죽음으로 그리스 여러 도시 국가들의 반란이 이어졌지만,


알렉산더는 모든 반란을 제압하고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평정합니다.


필리포스 2세가 이룩한 부강한 왕국과 강인한 군대를 앞세워 10년에 걸친 원정에 나섭니다.


과감한 전술과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무장한 알렉산더의 열망은 서서히 동쪽으로 펼쳐지게 됩니다.



그라니코스 전투



출처 : wikipedia



오늘날의 터키인 소아시아로 진격한 마케도니아 군대는 그라니코스 강에 방어진을 친 페르시아 군과 만나게 됩니다.


그리스 출신의 장군인 멤논 장군을 마주하게 된 마케도니아의 장군들은 야간 기습 작전을 계획하지만,


알렉산더 대왕은 야간 기습 작전을 거부하며 최정예 기병인 헤타이로이를 이끌고 강을 건너 돌진합니다.


알렉산더의 기병이 페르시아 군의 시선을 돌리는 사이 마케도니아의 군사들은 강을 건너 돌격하게 됩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지휘관이라는 후대의 평가에 걸맞게 과감히 소수의 기병을 이끌고 적진에 침투한 


알렉산더의 전술은 성공했으며 페르시아 군은 완전히 격파되어 죽거나 도망치게 됩니다.





이소스 전투



출처 : wikimedia



그라니코스에서의 처참한 패배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는 전투에 직접 출정하기로 결심합니다.


직접 군대를 지휘한 다리우스 3세의 병력은 약 30만에 이르는 대군이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는 약 4만 정도였고 수적으로 매우 열세인 상황이었습니다.


강 북쪽으로 병력을 포진시킨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더가 강을 건너면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전투가 진행됨에 따라 수적으로 전황으로 마케도니아 군대가 열세임을 파악한 알렉산더 대왕은,


정예 기병인 헤타이로이를 이끌고 다리우스 3세에게로 돌진하게 됩니다.


다리우스 3세는 자신의 병사들을 남긴 채 홀로 달아나게 되고,


페르시아 군은 다리우스 3세의 도망 소식에 전의를 잃고 격파당하게 됩니다.


다리우스의 어머니, 아내, 두 딸이 모두 포로가 되고, 알렉산더는 이들을 매우 정중히 대우하였다고 합니다.


이소스 전투의 패배 이후 다리우스 3세는 1만 달란트와 페르시아 제국 서쪽의 영토 양도 등


협상 조건을 제시했지만 알렉산더 대왕은 이를 거절하며 정복 전쟁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1만 달란트는 현재 가치로 치면 한화 약 3천억원 정도라고 합니다.



이집트 정복



비옥한 곡창 지대인 나일강으로 진격한 마케도니아군은 식량을 확보하게 됩니다.


정복 전쟁이 얼마나 길어질 지 모르는 마케도니아군에게 이집트의 정복은 안정된 식량을 보급받을 수 있는 요충지였습니다.


이집트에 도착한 알렉산더 대왕은 이집트인들에게 아문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게됩니다.


아문 신은 그리스의 제우스 신과 동일하게 여겨지던 신으로 알렉산더 대왕은 이를 기념해 동전까지 발행합니다.





가우가멜라 전투



출처 : wikimedia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의 마지막 전투가 가우가멜라에서 시작됩니다.


이소스 전투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다리우스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합니다.


다리우스 왕은 이소스 전투에서의 실수를 막기 위해 본인의 주변에 기병대를 배치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이끈 마케도니아 군의 가장 유명한 전술은 망치와 모루라는 전술로,


팔랑크스로 적의 움직임을 막고 헤타이로이를 우회시켜 적의 후방을 공격하여 전열을 흐뜨리는 전술이었습니다.


마케도니아의 헤타이로이 기병은 다리우스를 향해 돌진하다가 페르시아 기병을 다리우스와 멀어지게 유인작전을 사용하고,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에 의해 봉쇄당한 페르시아 기병을 둔 채 다시 다리우스에게로 돌진하게 됩니다.


다리우스 3세는 다시 달아나게 되고 마케도니아군의 승리로 전쟁은 끝나게 됩니다.



원정의 끝



출처 : wikimedia



가우가멜라 전투 이후, 페르시아 각 지역에서 수 많은 반란이 일어났지만 알렉산더 대왕은 이를 차례로 제압해 나갑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는 장군 베수스에 의해 살해 당하게 되고 다리우스 3세에게 페르시아 왕위를 직접 물려받고 싶었던


알렉산더 대왕은 베수스를 잔인하게 공개처형 합니다.


이후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의 예법과 문화에 심취하게 되고 페르시아인들을 가까이 두며,


원정을 함께 한 마케도니아의 장군들과 병사들에게 소홀해지게 됩니다.


마케도니아 장군들의 불만과 원성이 높아지며 알렉산더 암살 시도, 병사들의 파업과 철군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인도 원정에서 돌아온 알렉산더 대왕은 수 많은 관료들의 부정 축재를 발견하고 관련된 이들을 처형하기 시작했으며,


마케도니아 군에게 많은 급료로 그동안의 노고를 보상하며 마케도니아로 귀국하라고 합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 장군들과의 연회에서 많은 양의 술을 먹었으며,


그 이후 몸에 열이 나는 등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고열은 계속 되었고 알렉산더 대왕은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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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는 고대 그리스 반도에 위치했던 왕국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알렉산더 대왕이 마케도니아의 전성기를 이끈 왕이었으며,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오늘날 미국중국의 영토에 맞먹는 제국을 건설한 위대한 업적을 남깁니다.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가 풀네임이며 세계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다양한 영화나 문학 작품 등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알렉산더 /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기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다양한 평가들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대제국을 건설했던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마케도니아 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의 업적을 살피기 전에


약소국이었던 마케도니아의 성장 과정과 그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에 대해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마케도니아



출처 : wikimedia



마케도니아는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 중에서 영향력이 크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페르시아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는 흔히 이야기하는 2류 국가로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번갈아 지원하던 국가였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마케도니아를 야만족으로 취급을 하였으며 자연 환경 또한 매우 낙후되어 있는 나라였습니다.


마케도니아의 번영은 알렉산더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합니다.


어린 시절 테베에 볼모로 잡혀갔던 필리포스 2세는 펠레폰네소스 전쟁 이후 스파르타와의 레욱트라 전투에서 승리할 정도로


군사력을 키운 테베의 전술과 병법 등을 공부하고 마케도니아로 돌아오게 됩니다.



필리포스 2세의 군사 개혁



출처 : wikipedia



테베에서 배운 군사적 전략을 바탕으로 마케도니아의 군제 개혁을 단행하게 됩니다.


당시 그리스 국가들이 사용하던 사각형의 밀집 대형인 팔랑크스를 변형시킵니다.


대형의 병사수를 줄이는 대신 병사들에게 5.5m의 긴 창으로 무장시킵니다.


또한 최정예 기병대인 헤타이로이를 창설하며 마케도니아의 군대를 강력하게 만들어 나갑니다.


강력한 군대와 외교술로 그리스 전체를 장악해 나가던 필리포스 2세는,


BC 338년에 벌어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네와 테베의 연합군에 승리하게 됩니다.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역사에 등장한 필리포스 2세의 아들 알렉산더는 정예 기병을 이끌고 승리의 주역이 됩니다.


그리스를 제패한 마케도니아는 마침내 페르시아를 정벌할 군대를 정비하여 원정 준비에 돌입하게 됩니다.



필리포스 2세의 사망



페르시아 원정 준비를 거의 마칠 무렵 돌연 필리포스 2세가 사망하게 됩니다.


필리포스 2세의 죽음에는 다양한 설이 있는데 호위병에 의해 암살 당했다고 하는 설,


알렉산더의 어머니에 의해 암살 당했다는 설, 친척의 음모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하는 설,


알렉산더의 야망에 의한 알렉산더에 의한 암살설 등 다양한 설이 존재합니다.


알렉산더는 본인에 의한 죽음이 아닌 페르시아에 의한 암살이라고 주장하며 페르시아 정벌에 대한 명분을 만들고,


본인이 왕이 되어 페르시아 원정을 떠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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