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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십자군 전쟁으로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탈환합니다.



팔레스타인과 소아시아에는 십자군 국가가 세워졌으며


예루살렘으로 성지 순례를 오는 유럽인들이 증가하며 십자군 왕국은 번성하기 시작합니다.


십자군의 예루살렘은 기독교와 이슬람교 등 수 많은 종교들이 공존하는 화합 정책을 펼치게 됩니다.


하지만 기독교 세력과 이슬람 세력의 충돌은 지속적으로 이루어 지고 있었습니다.


성지 순례를 오는 유럽인들과 상인들을 게릴라 전술로 약탈하는 이슬람 세력이 늘어갔으며


기독교 세력은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국적 초월의 기사단이 등장합니다.


▶ 1차 십자군 전쟁 확인하기



이마드 앗딘 장기의 에데사 함락



출처 : wikipedia



이슬람 세력 내에서도 수니파와 시아파의 갈등은 지속적으로 이어집니다.


이러한 시기에 이슬람의 걸출한 영웅 이마드 앗딘 장기가 등장하게 됩니다.



이마드 앗딘 장기는 시리아 북부부터 수니파의 모든 세력을 통합합니다.


세력이 커진 장기는 1144년, 3만 대군을 이끌고 십자군의 에데사 탈환에 성공하게 됩니다.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약 50년간의 평화로운 시기를 보내던 십자군은, 


전투에 능한 기병 3만 대군을 이끌고 에데사로 진격한 이슬람 군대를 막을 준비가 되어있지 않았습니다.


공성전이 어려운 에데사에서 장기는 땅굴을 파서 성 안으로 돌진하는 전략으로 에데사를 함락시켰으며,


에데사에서는 끔찍한 학살이 시작됩니다.



장기의 에데사 함락은 이슬람 세력에 큰 파장을 일으키며 이슬람 세력의 통합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2차 십자군 결성



에데사가 함락되자 유럽인들은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하며 교황 에우제니오 3세의 호소로 2차 십자군이 결성됩니다.


독일의 콘라트 3세, 프랑스의 루이 7세, 영국의 에티엔 등 다수의 귀족과 사제들이 참가하게 됩니다.


하지만 2차 십자군은 한 겨울에 터키를 통과하는 루트로 진격을 하게 되고,


식량 조달에 큰 어려움을 겪은 2차 십자군은 전투 식량을 모두 소비하며 시작부터 삐걱거리게 됩니다.



하틴의 뿔 전투



출처 : wikipedia



하틴 지역의 두 개의 사화산 사이에 위치하여 하틴의 뿔이라 불리는 이 지역에서


십자군과 살라딘 군대의 대규모 전투가 벌어집니다.



십자군은 중무장 기사 1,200명이 동원되는 등 십자군 사상 최대의 규모를 자랑했습니다.


아랍군 역시 비슷한 규모의 군대가 파병되었으며 다양한 용병군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당시 십자군을 이끌던 는 전투 경험이 부족한 상황이었으며 이로 인해 물이 없는 하틴에 진을 치게 됩니다.


물 부족과 체력 고갈로 십자군은 거의 전투 불능의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고, 


이를 확인한 이슬람의 살라딘은 새벽 기습을 감행하여 십자군을 전멸시키게 됩니다.



하틴의 뿔 전투로 살라딘은 이슬람의 영웅으로 부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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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군 본대가 예루살렘으로 진격합니다.



1차 십자군 전쟁의 서막이 오르게 됩니다.


타란토의 보에몽, 부용의 고르푸르아, 볼로듀의 보두앵, 툴루즈의 레몽 등


유럽 각지의 군주들이 콘스탄티노플로 집결하기 시작합니다.


▶ 십자군 전쟁의 원인 확인하기

▶ 비잔티움 확인하기



셀주크 투르크 니케아 함락



출처 : wikipedia



당시 셀주크 투르크의 왕이었던 아르슬란은 십자군이 공격해온다는 소식을 듣지만,


민중 십자군의 형편 없는 실력에 방심을 하여 십자군 본대의 침공까지 무시해버립니다.


셀주크의 수도였던 니케아를 비우고 형제들과의 권력 싸움에 몰두하던 아르슬란


니케아가 십자군에 의해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황급히 니케아로 돌아옵니다.


십자군과 전면전에 나선 셀주크 투르크는 전투에서 패하게 되며,


아르슬란은 니케아의 시민들을 학살하지 않는 조건을 내세우며 비잔티움에게 항복을 약속합니다.



비잔티움은 니케아 성을 점령하고 약속대로 학살을 금지합니다.


전투는 십자군이 했지만 모든 이익은 비잔티움이 챙기게 된 상황이 발생하자,


십자군과 비잔티움의 갈등은 깊어가고 니케아 공방 이후 비잔티움은 십자군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지합니다.





안티오크 전투



니케아에서 쫓겨나듯 나온 십자군은 안티오크를 향해 진격합니다.


안티오크는 망루 400개가 있었으며 총 성벽의 길이가 12km에 달하는 요새였습니다.



안티오크에 다다른 십자군은 약 1만명 정도였으며 병력이 매우 열세인 상황이었습니다.


비잔티움의 지원이 끊기고 기나긴 행군에 지친 십자군은 굶주림에 시달립니다.



반면 안티오크 성안의 오스만 투르크는 상대적으로 식량이 풍부한 상황이었습니다.


안티오크의 군주 야기 시안은 성 안의 기독교인들을 성 밖으로 내보내 참호를 파라고 명령한 뒤 성을 닫아버립니다.


십자군은 성 밖으로 나온 기독교인들의 식량까지 지원을 해야했으며 식량난이 더욱 심해집니다.



십자군에 포위된 안티오크는 근처의 이슬람 세력에게 지원을 요청하지만,


알레포와 다마스쿠스는 서로간의 세력 싸움으로 인해 지원을 거부합니다.


지원에 응한 모술은 지원군을 파견하지만 안티오크로 바로 지원을 오지 않고, 세력 확장을 위해 에데사로 향하게 됩니다.



지원이 오지 않자 절망감에 빠진 안티오크군은 십자군의 보에몽과 내통을 하게 되고 성은 함락됩니다.


처음에는 유리한 상황이었지만 지원군이 오지 않은 안티오크는 십자군에 의해 점령당하게 되고,


안티오크를 점령한 십자군은 중요한 거점을 확보하게 됩니다.



예루살렘 공방전



출처 : wikipedia



1099년 6월 안티오크를 점령한 십자군은 예루살렘으로 진격합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이슬람 시아파인 이집트 파티마 왕조가 지배를 하고 있었습니다.


안티오크에서 예루살렘으로 진격하는 십자군은 약탈하지 않는 조건으로 수니파의 도움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도착합니다.



공성탑으로 밀어 붙인 십자군은 예루살렘 탈환에 성공합니다.



1차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탈환하며 승리를 쟁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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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루살렘으로의 성지 순례가 로마 사회에 퍼지기 시작합니다.



구약 성서의 아브라함은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공동 조상으로,


셀주크 튀르크 등장 이전의 시기에는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관계가 나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1세기에 셀주크 튀르크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게 되면서 성지 순례를 전면 차단하게 됩니다.


▶ 만지케르트 전투 확인하기

▶ 흉노 전쟁 확인하기

▶ 몽골 전쟁 확인하기



셀주크 튀르크의 기원



출처 : wikipedia



이슬람 사회는 고대부터 병농 일치제로 전문 군인을 적극적으로 양성하던 사회가 아니었습니다.


그로 인해 이슬람 사회는 노예를 군인 엘리트 층으로 양성하기 시작합니다.


이들 군인 계급을 맘루크 Mamluk 로 불렀으며, 투르크 족을 강제로 이슬람교로 개종을 시켜 맘루크를 구성합니다.



투르크족은 중앙 아시아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유목 민족으로,


흉노 제국 시대와 몽골 제국 시대, 돌궐 제국 시대까지 고유한 문화를 발전시켜 나가던 민족입니다. 


투르크족으로 구성된 맘루크는 점차 세력이 확장되었고 셀주크 투르크의 정권을 차지하기에 이릅니다.





십자군 전쟁의 원인



출처 : wikipedia



투르크족의 영향력은 소아시아까지 미치게 되며 만지케르트 전투를 통해, 


비잔티움의 세력을 소아시아에서 밀어내게 됩니다. 


비잔티움 제국은 셀주크 투르크와의 전쟁을 준비하며 용병 자원자를 모집할 계획이었으나,


교황에 도움을 요청하자 교황의 이름으로 된 군대가 창설되며 예루살렘 성지 탈환 전쟁으로 전쟁의 성격이 변하게 됩니다.



또한 당시의 유럽의 상황 또한 십자군 전쟁을 가속화 시키는 원인이 됩니다.


일종의 봉건적 성격을 지니던 영주들이 자신의 세력을 다스리고 있었으며,


교황은 세속적으로 이탈리아의 30% 정도를 직접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교황은 유럽에서 자신의 힘을 강화하고 세력을 확장시키려 했으며 자신의 권위를 드러내야 했습니다.


교황에게 예루살렘 성지 탈환은 좋은 명분이었으며 자신의 이름으로 군대를 조직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영주들은 당시 유럽내에서의 잦은 전쟁과 세력 다툼으로 인해 채무가 많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지 탈환은 무역의 중심지 소아시아를 점령하고 채무를 탕감할 수 있는 좋은 조건이기도 했습니다.



민중 십자군



하나님에게 편지를 받았다고 민중들을 선동한 은자 피에르는 민중들을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이동합니다.


본격적인 십자군 전쟁에 앞서 민중 십자군이 결성됩니다.



하지만 정식 군대가 아니었으며 규율이 잡히지 않았던 민중 십자군은 예루살렘으로 이동하면서 약탈을 일삼았으며,


민중 십자군이 헝가리를 약탈하자 헝가리군과 동로마군이 출동하여 민중 십자군을 살육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소아시아에 도착한 민중 십자군은 결국 셀주크 투르크 군대에게 몰살당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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