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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의 몽골군은 정복 전쟁을 멈추지 않습니다.



몽골을 통일한 칭기즈칸은 서하와 호라즘을 정복하였으며,


칭기즈칸의 뒤를 이은 칸들은 금과 남송, 유럽을 정복하며 몽골족의 위세를 떨칩니다.


오고타이 칸의 죽음으로 유럽 정벌을 중지한 몽골군은 아랍을 정복하기 위해 출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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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골군의 서하, 호라즘 정복 확인하기



몽골군의 이슬람 정벌



출처 : wikipedia



이슬람의 왕인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에게 몽골군은 항복을 권유합니다.


당시 아랍 제국은 이란, 이라크를 포함한 현재의 중동과 이집트를 포함한 북아프리카를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 이란 환율, 화폐, 이란 혁명 확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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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제국의 우마이야 왕조를 무너뜨리고 세워진 아바스 왕조는 750년부터 1258년까지 존속했습니다.


아바스 왕조는 몽골의 침입으로 수도 바그다드가 5일만에 함되며 카이로로 천도하게 됩니다.


항복을 하지 않고 저항한 아바스 왕조의 수도 바그다드는 몽골군에 의한 대학살이 이어집니다.


칼리프는 사로 잡혀 멍석에 말린 채 말들에게 짓밟혀 최후를 맞이하게 됩니다.





몽골 제국의 변화와 5대 칸 쿠빌라이



출처 : wikipedia



몽골 제국의 4대 칸인 몽케의 뒤를 이을 5대 칸의 자리를 놓고 신경전이 펼쳐지게 됩니다.


칭기즈칸의 막내 아들인 툴루이는 셋째 형인 오고타이에 밀려 2대 칸에 오르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첫째 형이자 칭기즈칸의 장남인 주치의 아들 바투가 킹메이커의 역할을 하며,


툴루이의 아들 중 장남인 몽케를 4대 칸으로 추대합니다.



몽골 제국 칸 - 5대 까지

 1대 칸

 칭기즈 칸

 어린시절 테무르, 몽골 제국을 통일한 몽골 제국 건국자

 2대 칸

 오고타이 칸

 칭기즈 칸의 세번째 아들로 정치에 탁월한 능력을 지님

 3대 칸

 귀위크 칸

 오고타이의 장남

 4대 칸

 몽케 칸

 칭기즈 칸의 막내 아들 툴루이의 장남

 5대 칸

 쿠빌라이 칸

 툴루이의 차남, 원나라의 시조



1259년 4대 칸인 몽케가 사망하자 5대 칸의 자리를 놓고 쿠빌라이와 동생 아리크부카의 세력 싸이 진행됩니다.


아리크부카는 몽골 북쪽의 초원 지대의 족장들의 지지를 얻고 있었으며,


쿠빌라이는 중국과 가까운 북중국 인접의 족장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습니다.



쿠빌라이는 중국 문명을 수용하며 티베트의 종교, 정치 문제도 관여를 하는 등 개방적인 행보를 펼쳤고


아리크부카는 몽골의 전통 문명을 고수하며 다소 폐쇄적인 입장을 고수합니다.


쿠빌라이와 아리크부카의 내전이 발발하고 쿠빌라이가 승리하면서 원나라를 건국하게 됩니다.



각자의 세력을 가지고 정복 원정을 떠난 많은 부족들은 정복지에 정착하고 융화되면서 각자의 길을 걷게 됩니다.


서방으로 진격했던 몽골군은 서양이 화약 무기의 시대가 열리면서 정복 전쟁에 제약이 걸리게 됩니다.



몽골 제국의 정복 전쟁은 마무리가 되며 5대 칸에 오른 쿠빌라이의 원나라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다양한 문화를 인정하고 수용했던 몽골족의 개방 정책은 동서 문화 교류에 큰 역할을 합니다.



고대의 알렉산더 대왕, 페르시아 제국과 마찬가지로 몽골의 강인함은 유연성에서 나왔다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 알렉산더 대왕 확인하기

▶ 페르시아 전쟁 확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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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제국은 서하와 호라즘, 금과 남송을 정복합니다.



몽골 대제국을 건설한 칭기즈칸이 죽고 난 후, 


칭기즈칸의 셋째 아들 오고타이가 제 2대 황제로 등극하며,


칭기즈칸의 막내 아들인 툴루이의 아들 쿠빌라이로 권력이 승계됩니다.


2대 칸과 3대 칸의 시기가 도래하면서 본격적인 서방 원정이 시작됩니다.


▶ 몽골군의 금나라, 남송 정벌 확인하기

▶ 몽골군의 서하, 호라즘 정벌 확인하기



몽골군의 러시아 정벌



출처 : wikipedia



칭기즈칸의 첫째 아들인 장남 주치는 왕위 계승에서 일찌감치 멀어지게 됩니다.


용맹한 장수였던 주치의 아들 바투 역시 전사였으며 러시아 원정의 총 책임자로 임명됩니다.


원정군 총 지휘에는 몽골군 제일의 전술가이자 칭기즈칸의 누케르 수부타이가 임명됩니다.



당시 러시아는 크고 작은 공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시기였으며 러시아군은 농민군 수준으로 질이 낮았습니다.


1223년 러시아 연합군이 키예프를 중심으로 모였으며 몽골군과의 칼가 강 전투가 시작됩니다.


러시아 연합군은 몽골군의 위장 유인 전술인 망구다이에 걸려 참패를 거듭합니다.


몽골군의 진격 속도와 전투 방식을 모른 채 전투에 임한 러시아군은 전투마다 처참하게 패배를 합니다.


결국 키예프가 함락되고 도시는 몽골군에 의해 약탈, 학살 당하며 초토화가 됩니다.



몽골군의 침략으로 인해 러시아의 중심은 키예프에서 모스크바로 옮겨가게 되며,


현재 러시아의 수도인 모스크바는 몽골군의 침입으로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것입니다.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고 이 시기를 타타르의 멍에라고 부릅니다.


▶ 러시아 환율, 화폐 확인하기





몽골군의 유럽 정벌   



출처 : wikipedia



러시아를 정벌한 몽골군은 다시 서쪽으로 진격을 시작합니다.


폴란드는 몽골군 침략에 대비하여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용병을 모집합니다.


폴란드군은 헨리크 2세의 지휘를 받으며 출정했고 당시 유럽에서 폴란드군은 그나마 전투가 가능한 부대였습니다.  


하지만 몽골군의 망구다이 전술에 폴란드군과 용병들은 처참히 무너지게 됩니다.


폴란드 연합군은 레그니차 전투에서 참패를 하며 병사들의 귀가 잘리는 수모를 겪게 됩니다.



폴란드를 정복한 몽골군은 헝가리로 향합니다.


야간에 사요강을 건너던 바투의 부대는 헝가리 별동대와 마주하게 됩니다.


활을 겨냥하기 어려운 야간 전투와 배수의 진이 되어버린 강으로 인해 기동전을 펼치지 못한 몽골군은 고전하게 됩니다.


뜻밖의 상황에 고전한 몽골군은 후퇴하게 되고 몽골군 최고 사령관인 수부타이가 출진하게 됩니다.


바투의 몽골군이 포위망을 구축하는 사이 수부타이는 별동대를 이끌고 헝가리 본진을 공격하며,


몽골군의 주특기인 망구다이를 다시 사용하게 됩니다. 헝가리군은 전멸하게 됩니다.



폴란드와 헝가리를 점령한 몽골군은 이탈리아 북부와 오스트리아를 정찰합니다.


그러나 오고타이 칸의 사망으로 인해 몽골군은 철수를 하게 됩니다. 



몽골군의 진군 중단은 동유럽과 서유럽의 경계와 문화를 확연히 갈라놓는 계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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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와 호라즘 정복을 마친 칭기즈칸은 금나라 정벌에 착수합니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군대로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한 야망이 꿈틀댑니다.


어느 방향으로 가든지 1년이 걸리는 땅을 자식들에게 남겨주려는 칭기즈칸은


금나라 정벌을 준비하던 중 자신의 죽음이 다가왔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서방 진출의 주요 거점이었던 서하인을 몰살하라는 유언을 남긴 칭기즈칸은 평소 적대적이었던 서하를 


지구상에서 완전히 멸함으로써 위험요소를 제거하고 서하 지역을 베이스캠프로 확보하려는 의도로 추정됩니다.


▶ 서하 정복과 호라즘 정복 확인하기

▶ 칭기즈칸, 테무친의 성장 확인하기





몽골 금나라 정벌



출처 : wikipedia



1211년에 시작된 금나라 정벌은 칭기즈칸이 죽을때까지 지속되었으며, 1234년이 되어야 마침표를 찍게 됩니다.


칭기즈칸의 몽골 통일 전, 몽골족을 가혹하게 억압했던 금나라를 치기 위해 남송에 동맹을 제안합니다.


금나라에 밀려 남쪽으로 쫓겨났던 남송에게는 몽골군의 제안이 매우 반가웠습니다.



몽골군은 1213년에 허베이성의 선화를 정복하고 산서성의 태원과 린펀을 차례로 정복합니다.


이후 하북과 산둥 평원을 가로질러 하간과 제남을 정복하게 됩니다.


그리고 북경으로 진격하여 북경을 포위하고 공격하던 중 금나라의 화의를 받아들여 막대한 전쟁배상금을 받고 물러납니다.



금나라는 북경을 버리고 개봉으로 천도하게 되고 몽골군은 다시 북경을 공격하여 함락시킵니다.


칭기즈칸은 금나라의 정벌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칭기즈칸의 후계자인 톨루이가 1234년 정복을 마무리합니다.



수많은 전투 중 가장 중요한 전투는 삼봉산 전투로 몽골군이 금나라의 주력군을 격파한 전투입니다.


보병과 기병의 연합 전술에 능하고 유목 생활을 했지만 농경 생활에도 적응이 빨랐던 금나라의 여진족은,


금나라의 건국과 중국 대륙을 차지한 후 쇠락의 길을 걷게 되며 용맹한 기운마저 잃어가게 됩니다.



1234년 금나라는 몽골과 남송의 연합군에 의해 대패하고 금나라의 황제 애종은 도망친 후 자살하게 됩니다.



이로써 금나라는 멸망하게 됩니다.  

 


몽골 남송 정벌



출처 : wikipedia



칭기즈칸의 막내 아들인 툴루이의 아들인 쿠빌라이, 칭기즈칸의 손자인 쿠빌라이가 남송 정벌에 착수합니다.



몽골에 투항한 남송의 장군 유장은 양양성을 먼저 공격한 후 배를 타고 수도로 진격하라는 조언을 하고


몽골군은 한족 출신의 수군을 동원하여 양양성을 포위한 후 공격하게 됩니다.


양양성과 번성을 포위하여 공격하면서 동시에 수군을 양성하여 대륙 정벌을 차근히 준비해 나갑니다.


번성을 함락시킨후 회회포를 설치해 양양성을 포격하였으며 


고립무원이 된 양양성의 수비 대장 여문환이 몽골군에 투항하면서 양자강 일대의 군벌 라인이 모두 항복하게 됩니다.



약 50여 년간의 남송의 항거는 끝이 나게 되고 몽골군의 승리로 막을 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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