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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필리포스 2세가 암살 된 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로 진격합니다.



필리포스 2세의 죽음으로 그리스 여러 도시 국가들의 반란이 이어졌지만,


알렉산더는 모든 반란을 제압하고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평정합니다.


필리포스 2세가 이룩한 부강한 왕국과 강인한 군대를 앞세워 10년에 걸친 원정에 나섭니다.


과감한 전술과 전쟁 경험을 바탕으로 무장한 알렉산더의 열망은 서서히 동쪽으로 펼쳐지게 됩니다.



그라니코스 전투



출처 : wikipedia



오늘날의 터키인 소아시아로 진격한 마케도니아 군대는 그라니코스 강에 방어진을 친 페르시아 군과 만나게 됩니다.


그리스 출신의 장군인 멤논 장군을 마주하게 된 마케도니아의 장군들은 야간 기습 작전을 계획하지만,


알렉산더 대왕은 야간 기습 작전을 거부하며 최정예 기병인 헤타이로이를 이끌고 강을 건너 돌진합니다.


알렉산더의 기병이 페르시아 군의 시선을 돌리는 사이 마케도니아의 군사들은 강을 건너 돌격하게 됩니다.


두려움을 모르는 지휘관이라는 후대의 평가에 걸맞게 과감히 소수의 기병을 이끌고 적진에 침투한 


알렉산더의 전술은 성공했으며 페르시아 군은 완전히 격파되어 죽거나 도망치게 됩니다.





이소스 전투



출처 : wikimedia



그라니코스에서의 처참한 패배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는 전투에 직접 출정하기로 결심합니다.


직접 군대를 지휘한 다리우스 3세의 병력은 약 30만에 이르는 대군이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의 군대는 약 4만 정도였고 수적으로 매우 열세인 상황이었습니다.


강 북쪽으로 병력을 포진시킨 다리우스 3세는 알렉산더가 강을 건너면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전투가 진행됨에 따라 수적으로 전황으로 마케도니아 군대가 열세임을 파악한 알렉산더 대왕은,


정예 기병인 헤타이로이를 이끌고 다리우스 3세에게로 돌진하게 됩니다.


다리우스 3세는 자신의 병사들을 남긴 채 홀로 달아나게 되고,


페르시아 군은 다리우스 3세의 도망 소식에 전의를 잃고 격파당하게 됩니다.


다리우스의 어머니, 아내, 두 딸이 모두 포로가 되고, 알렉산더는 이들을 매우 정중히 대우하였다고 합니다.


이소스 전투의 패배 이후 다리우스 3세는 1만 달란트와 페르시아 제국 서쪽의 영토 양도 등


협상 조건을 제시했지만 알렉산더 대왕은 이를 거절하며 정복 전쟁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1만 달란트는 현재 가치로 치면 한화 약 3천억원 정도라고 합니다.



이집트 정복



비옥한 곡창 지대인 나일강으로 진격한 마케도니아군은 식량을 확보하게 됩니다.


정복 전쟁이 얼마나 길어질 지 모르는 마케도니아군에게 이집트의 정복은 안정된 식량을 보급받을 수 있는 요충지였습니다.


이집트에 도착한 알렉산더 대왕은 이집트인들에게 아문 신의 아들이라는 신탁을 받게됩니다.


아문 신은 그리스의 제우스 신과 동일하게 여겨지던 신으로 알렉산더 대왕은 이를 기념해 동전까지 발행합니다.





가우가멜라 전투



출처 : wikimedia



마케도니아와 페르시아의 마지막 전투가 가우가멜라에서 시작됩니다.


이소스 전투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다리우스 왕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합니다.


다리우스 왕은 이소스 전투에서의 실수를 막기 위해 본인의 주변에 기병대를 배치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이끈 마케도니아 군의 가장 유명한 전술은 망치와 모루라는 전술로,


팔랑크스로 적의 움직임을 막고 헤타이로이를 우회시켜 적의 후방을 공격하여 전열을 흐뜨리는 전술이었습니다.


마케도니아의 헤타이로이 기병은 다리우스를 향해 돌진하다가 페르시아 기병을 다리우스와 멀어지게 유인작전을 사용하고,


마케도니아의 팔랑크스에 의해 봉쇄당한 페르시아 기병을 둔 채 다시 다리우스에게로 돌진하게 됩니다.


다리우스 3세는 다시 달아나게 되고 마케도니아군의 승리로 전쟁은 끝나게 됩니다.



원정의 끝



출처 : wikimedia



가우가멜라 전투 이후, 페르시아 각 지역에서 수 많은 반란이 일어났지만 알렉산더 대왕은 이를 차례로 제압해 나갑니다.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3세는 장군 베수스에 의해 살해 당하게 되고 다리우스 3세에게 페르시아 왕위를 직접 물려받고 싶었던


알렉산더 대왕은 베수스를 잔인하게 공개처형 합니다.


이후 알렉산더 대왕은 페르시아의 예법과 문화에 심취하게 되고 페르시아인들을 가까이 두며,


원정을 함께 한 마케도니아의 장군들과 병사들에게 소홀해지게 됩니다.


마케도니아 장군들의 불만과 원성이 높아지며 알렉산더 암살 시도, 병사들의 파업과 철군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인도 원정에서 돌아온 알렉산더 대왕은 수 많은 관료들의 부정 축재를 발견하고 관련된 이들을 처형하기 시작했으며,


마케도니아 군에게 많은 급료로 그동안의 노고를 보상하며 마케도니아로 귀국하라고 합니다.


알렉산드로스는 마케도니아 장군들과의 연회에서 많은 양의 술을 먹었으며,


그 이후 몸에 열이 나는 등 몸에 이상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고열은 계속 되었고 알렉산더 대왕은 결국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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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도니아는 고대 그리스 반도에 위치했던 왕국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알렉산더 대왕이 마케도니아의 전성기를 이끈 왕이었으며,


페르시아를 정복하고 오늘날 미국중국의 영토에 맞먹는 제국을 건설한 위대한 업적을 남깁니다.


알렉산드로스 3세 메가스가 풀네임이며 세계사에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다양한 영화나 문학 작품 등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는 알렉산더 /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원정기는


현대에 이르러서도 다양한 평가들이 엇갈리고 있습니다.


대제국을 건설했던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마케도니아 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의 업적을 살피기 전에


약소국이었던 마케도니아의 성장 과정과 그의 아버지 필리포스 2세에 대해 먼저 알아보겠습니다.





마케도니아



출처 : wikimedia



마케도니아는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 중에서 영향력이 크지 않은 나라였습니다.


페르시아 전쟁,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는 흔히 이야기하는 2류 국가로 스파르타와 아테네를 번갈아 지원하던 국가였습니다.


그리스 사람들은 마케도니아를 야만족으로 취급을 하였으며 자연 환경 또한 매우 낙후되어 있는 나라였습니다.


마케도니아의 번영은 알렉산더의 아버지인 필리포스 2세가 왕으로 즉위하면서 발판을 마련하기 시작합니다.


어린 시절 테베에 볼모로 잡혀갔던 필리포스 2세는 펠레폰네소스 전쟁 이후 스파르타와의 레욱트라 전투에서 승리할 정도로


군사력을 키운 테베의 전술과 병법 등을 공부하고 마케도니아로 돌아오게 됩니다.



필리포스 2세의 군사 개혁



출처 : wikipedia



테베에서 배운 군사적 전략을 바탕으로 마케도니아의 군제 개혁을 단행하게 됩니다.


당시 그리스 국가들이 사용하던 사각형의 밀집 대형인 팔랑크스를 변형시킵니다.


대형의 병사수를 줄이는 대신 병사들에게 5.5m의 긴 창으로 무장시킵니다.


또한 최정예 기병대인 헤타이로이를 창설하며 마케도니아의 군대를 강력하게 만들어 나갑니다.


강력한 군대와 외교술로 그리스 전체를 장악해 나가던 필리포스 2세는,


BC 338년에 벌어진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아테네와 테베의 연합군에 승리하게 됩니다.


카이로네이아 전투에서 역사에 등장한 필리포스 2세의 아들 알렉산더는 정예 기병을 이끌고 승리의 주역이 됩니다.


그리스를 제패한 마케도니아는 마침내 페르시아를 정벌할 군대를 정비하여 원정 준비에 돌입하게 됩니다.



필리포스 2세의 사망



페르시아 원정 준비를 거의 마칠 무렵 돌연 필리포스 2세가 사망하게 됩니다.


필리포스 2세의 죽음에는 다양한 설이 있는데 호위병에 의해 암살 당했다고 하는 설,


알렉산더의 어머니에 의해 암살 당했다는 설, 친척의 음모에 의해 살해당했다고 하는 설,


알렉산더의 야망에 의한 알렉산더에 의한 암살설 등 다양한 설이 존재합니다.


알렉산더는 본인에 의한 죽음이 아닌 페르시아에 의한 암살이라고 주장하며 페르시아 정벌에 대한 명분을 만들고,


본인이 왕이 되어 페르시아 원정을 떠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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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는 해상 무역 왕국으로 번영하게 됩니다.



농업국이었던 스파르타는 페르시아 전쟁에서는 승리하였지만,


실질적인 해상 주도권을 아테네에 빼앗긴 채 큰 이득을 가져가지는 못합니다.


당시 그리스 도시 국가 중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전운에 휩싸이게 됩니다.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동맹



출처 : wikipedia



아테네를 중심으로 페르시아의 재침략에 대비하는 델로스 동맹과,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한 펠로폰네소스 동맹이 결성되며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양분화 되기 시작합니다.


당시 해상의 1인자는 아테네, 육지의 1인자는 스파르타로 첨예한 갈등이 시작되던 중


해상의 2인자였던 코린토스와 육지의 2인자였던 아르고스, 그리스 패권 다툼에서 소외되었던 테베가


영향력을 차지하기 위해 전면으로 등장하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막이 열리게 됩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서막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를 중심으로 한 델로스 동맹국들은 물자나 자원, 자금 등을 집결시키게 됩니다.


페르시아의 재침공에 준비하게 되고 델로스 섬에 위탁된 자금을 관리하던 아테네가 


기금을 무단 전횡하고 동맹 국가들에 대한 법적, 정치적 간섭에 나서게 되며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됩니다.


아테네는 동맹 기금으로 아테네를 요새화 시키는 한편 아테네에 신전, 피레우스 항구, 성벽을 건설합니다.



이를 확인한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해명을 요청하게 되고 스파르타에 도착한 아테네의 사절단은


일종의 제국주의를 선언하며 살라미스 해전 당시의 스파르타 해군의 낮은 기여도를 언급하게 됩니다.


동맹 기금과 해상 무역을 기반으로 계속 성장하는 아테네에 대한 스파르타의 견제가 시작됩니다. 


해상의 2인자 코린토스와 아테네 동맹국 케르키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아테네가 동맹국인 케르키라를 지원하게 되고 스파르타는 코린토스를 지원하게 됩니다.



제 1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아테네의 페리클레스는 스파르타가 지상전으로 공격할 시 아테네 성벽 안으로 이주하여 방어전을 펼치는 동시에,


아테네의 해군이 출정하여 스파르타의 해상을 봉쇄하는 작전을 세웁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하게 아테네 성벽 안에 전염병이 돌면서 수많은 민간인과 군인의 25%가 죽게됩니다.



가장 결정적으로 페리클레스와 그의 두 아들까지 전염병으로 사망하게 되며 아테네는 쇠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페리클레스 사망 이후 서서히 분열되된 아테네는 스파르타를 선제 공격하게 되며 스팍테리아 전투가 발발합니다.


스팍테리아 전투에서 스파르타는 최초로 아테네에 패배하게 되며 200명의 전사자와 포로가 발생하게 됩니다.


양측의 막대한 손실과 피해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니키아스 평화조약을 맺고 6년간 지속됩니다.



제 2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염병과 전쟁으로 인해 큰 손실을 입은 아테네는 경제, 해군력 재건을 위해 주변 소도시들을 약탈하기 시작합니다.


아테네는 시칠리아, 이집트, 이오니아 지방에서 곡물을 수입하고 있었습니다.


시칠리아 지역에서 아테네 이민자들과 스파르타 이민자들 사이에 갈등이 발생하며


아테네 이민자들은 아테네에 지원 요청을 하게 됩니다.


지중해에 걸친 아테네 제국을 건설하고 싶었던 알키비아데스의 야망은 실현되어 시칠리아 원정을 떠나게 됩니다.


당시 시칠리아 원정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알키비아데스와 니키아스는 앙숙의 관계였습니다.



출정 전날 아테네의 모든 헤르메스 신상이 훼손되는 일이 발생하고 유력한 용의자로 알키비아데스가 지목됩니다.


니키아스에 의해 계획된 공작이라는 알키비아데스의 주장에도 불구하고


이미 출항을 한 알키비아데스를 아테네로 소환하라는 명령이 떨어지고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로 망명하게 됩니다.



스파르타로 망명한 알키비아데스는 아테네를 멸망시킬 다양한 전술을 스파르타에게 전달해주게 됩니다.


시칠리아로 스파르타 원군을 보내 아테네 해군을 전멸 시켰으며,


아테네 인근의 데켈레이아를 점령하여 일 년 내내 아테네에 압박을 가해 농작물을 불태웠으며,


경제 압박과 해상 군대를 모두 잃은 아테네는 위기의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하지만 알키비아데스는 스파르타 왕비와의 스캔들로 사형 선고를 받고 페르시아로 망명하게 됩니다.



제 3차 펠로폰네소스 전쟁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마지막 전쟁인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이 발발하게 됩니다.


시칠리아에서 스파르타에게 대패한 아테네는 총 병력을 동원하여 마지막 일격을 준비합니다.


당시 스파르타는 개혁을 단행하여 노예에 해당하는 최하층 계급에게까지 권한을 부여하며 전쟁에 참여시키게 됩니다.



페르시아로부터 해군 원조를 받아낸 스파르타는 에게해와 이오니아 지방에서 일어난


아테네에 대한 도시 국가들의 반란을 지원하고 아이고스포타모이 해전을 승리하며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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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 연합과 페르시아 제국 사이에 일어난 전쟁입니다.



페르시아 전쟁은 우리가 흔히 잘 알고 있는 영화 300의 배경으로도 유명합니다.


현대 스포츠 마라톤의 기원이 되었다고 알려진 마라톤 전투 역시 페르시아 전쟁의 전투입니다.


페르시아는 제국이라 불릴 정도로 광활한 영토와 막강한 군사력, 경제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전쟁에서 그리스 연합 도시 국가에 패하게 되며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페르시아 제국



출처 : wikimedia commons



페르시아 제국은 오늘날 이란의 영토를 근거로 세워진 나라입니다.


중동과 터키, 북아프리카, 중앙아시아, 인도까지 진출했던 대제국입니다.


페르시아의 어원은 고대 이란계 부족 파르스와 이들이 살던 이란 남서부 지역 파르샤에서 유래했습니다.


로마 제국보다도 500년 앞선 세계 최초의 제국이 페르시아 제국입니다.


광활한 영토와 다양한 민족을 아우르기 위해 왕의 눈, 왕의 길, 왕의 귀의 통치 방법을 사용합니다.


기원전 5세기, 다리우스 1세에 의해 건설된 고대의 고속도로 왕의 길은 페르시아 왕도로도 불립니다.


약 2,700km의 왕의 길에는 중간 중간 역참을 설치 하였으며 이 길을 통해 이동한 관료들이 왕의 눈과 귀가 됩니다.


왕의 허가증을 지닌 전령은 왕의 길을 통해 약 2주 이내에 제국의 전역에 다다를 수 있었습니다.


왕의 길은 제국의 소식을 전하는 동시에 감시와 스파이 활동을 함께 수행하는 고대 최고의 교통망이자 통신망입니다.


광활한 영토와 다양한 민족을 아우르기 위해 개방적인 정책을 사용하며 제국으로의 발전을 이루어 냅니다.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



오늘날 터키와 시리아 주변의 소아시아 이오니아 지방에서 페르시아에 대한 반란이 일어납니다.


당시 소아시아의 그리스 도시들은 페르시아가 임명한 통치자를 축출하면서 그리스 본토의 도시 국가들로 지원을 받습니다.


그리스 도시 국가인 아테네와 에레트리아 군대의 지원으로 이오니아 지방의 도시 국가들은,


페르시아 제국의 북서부 지역의 최대 거점 도시 사르디스를 습격하여 페르시아의 신전과 도시를 불태워 버립니다.


반란을 제압한 페르시아 제국 다리우스 1세는 배후인 그리스를 침공할 계획을 세웁니다.



마라톤 전투



출처 : wikimedia commons



페르시아의 1차 침공은 폭풍을 만나 해군 선단이 몰살당하면서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본격적인 전투는 2차 침공인 마라톤 전투로부터 시작됩니다.


당시 그리스 도시 국가의 맹주였던 아테네는 페르시아 침공 소식에 스파르타에 원군 요청을 하지만,


당시 만월의 종교 축제 기간이었던 스파르타는 원군 요청을 거절하면서 아테네는 홀로 페르시아군을 맞게 됩니다.


마라톤 평야에 상륙한 페르시아군을 격파하고 급하게 아테네로 돌아와 페르시아 함대를 막아내며 전투에서 승리하게 됩니다.



페르시아 재 침공



출처 : wikimedia commons



마라톤 전투 이후 10년이 지나고 페르시아 제국의 황제 크세르크세스는 그리스를 다시 침공하게 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영화 300의 배경인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스파르타의 왕 레오디나스와 300명의 스파르타 병사는 모두 전사하게 됩니다.


에피알테스라는 그리스인이 페르시아 대군에게 테르모필레 협곡을 우회하는 샛길을 알려주게 되고


페르시아 군대는 아테네로 진격하여 아테네에 입성하게 됩니다.


페르시아 군대가 아테네에 입성했을때 아테네는 이미 비어있었으며,


아테네의 명장 테미스토클레스의 작전으로 시민들과 병력은 살라미스 섬으로 이주해 있었습니다.



세계 4대 해전, 살라미스 해전



출처 : wikimedia commons



마라톤 전투에 참가했던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리스군이 승리를 만끽하고 있을때,


앞으로 페르시아군의 재침공이 있다면 육지에 상륙하기전에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해군 양성을 준비합니다.


막대한 자금력이 필요했던 해군 양성에 그리스 사람들은 반대했습니다.


하지만 아테네의 라우레이온에서 대규모 은 광산이 발견되면서, 


그리스인 설득에 성공한 테미스토클레스는 자금을 확보하여 해군 양성에 돌입하게 됩니다.


아테네를 그리스 제일의 해군 국가로 만들어 이후 해외 무역과 식민지 확보 등 아테네 번영의 토대를 마련하게 됩니다.


페르시아의 군선은 그리스의 갤리선에 의해 괴멸당하게 되고 살라미스 해전은 그리스의 승리로 끝나게 됩니다.


살라미스 해전의 다음해, 스파르타 레오디나스 왕의 조카인 파우사니아스 왕이 지휘하는 5만의 그리스 연합군이


플라타이아 평원에서 페르시아 군을 격파하며 에게 해에서의 페르시아 영향력은 사라지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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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는 중앙 유럽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부다페스트를 수도로 하고 있으며 도시 중심으로 도나우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도나우강을 중심으로 강의 동쪽을 페스트, 서쪽을 부다로 불리는 지역으로 나뉘어져 있었고,


1873년 두 지역을 합쳐 오늘날의 부다페스트 명칭이 되었습니다.



헝가리 역사





헝가리는 광대한 평원과 지리적 중요성으로 인해 예로부터 수 많은 민족의 침입을 받아왔습니다.


기원전 1세기에는 로마 제국에 점령되어 로마 제국의 속주인 일리리쿰, 판노니아의 지배를 당합니다.


10세기 말 헝가리 왕국을 수립하여 중앙 유럽의 강국으로 성장합니다.


16세기 강력하게 성장하던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오스만 제국과 오스트리아 왕가의 분할 통치를 받습니다.


19세기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와 연합하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수립합니다.


제1차 세계 대전 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패전국이 되면서 해체되고 1918년 헝가리는 독립을 선언합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헝가리는 독일 주도의 추축국으로 전쟁에 참가하지만,


부다페스트가 포위되면서 헝가리는 연합국으로 돌아서게 됩니다.


1949년 사회주의공화국을 표방한 헝가리 공화국이 성립되고 1956년 헝가리 혁명을 거치면서,


1989년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도입하면서 헝가리 공화국으로 국호를 변경합니다. 





헝가리 화폐





헝가리의 공식 통화는 포린트 Forint로 ISO 코드 HUF를 사용합니다.


포린트의 보조 단위는 필레르 Filler로 100필레르는 1포린트와 같지만 현재는 사용되지 않고 있습니다.


헝가리 화폐 포린트는 동전과 지폐의 두 가지 종류로 사용됩니다.



헝가리 화폐 포린트

 동전

 5포린트

10포린트 

20포린트 

50포린트 

100포린트 

200포린트 

 지폐

 500포린트

1,000포린트 

2,000포린트 

5,000포린트 

10,000포린트 

20,000포린트 



헝가리 환율





2020년 2월 7일 기준 헝가리 1포린트는 3.86원입니다.



2020년 2월 7일 기준 헝가리 포린트 환율

 1포린트

3.86원 

 

2포린트 

7.72원 

5포린트 

19.3원 

 

10포린트 

38.6원 

20포린트 

77.2원 

 

50포린트 

193원 

100포린트 

386원 

 

200포린트 

772원 

500포린트 

1,930원 

 

1,000포린트 

3,860원 

2,000포린트 

7,720원 

 

5,000포린트 

19,300원 

10,000포린트

38,600원 

 

20,000포린트 

77,201원 

50,000포린트 

193,002원 

 

100,000포린트 

386,004원 



헝가리 환율을 쉽게 계산하는 방법은 1포린트에 4를 곱해 원으로 환산하는 방법입니다.


1포린트 4원, 10포린트 40원, 100포린트 400원, 1,000포린트 4,000원, 10,000포린트 40,000원으로 생각하면 편리합니다.



헝가리 물가



물가가 비교적 저렴하다고 알려져 있지만 상대적으로 주변 유럽 국가들에 비해 저렴한 정도입니다.


도미토리 호스텔의 경우 5,000포린트에서 10,000포린트 한화 20,000원에서 40,000원 정도입니다.


식사는 2,000포린트에서 3,000포린트 한화 8,000원에서 12,000원 정도면 일반 레스토랑 이용 가능합니다.


빅맥 지수는 1,600포린트 한화 약 6,500원 정도 입니다.


커피나 간식의 경우 500포린트 한화 약 2,000원 정도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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