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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49년 1월 12일 카이사르는(시저) 루비콘 강을 건너게 됩니다.



삼두정치가 막을 내리고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로마 패권을 결정짓는 전쟁이 시작됩니다.


어찌보면 마리우스와 술라의 로마 내전의 연장선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대표적인 벌족파였던 술라와 폼페이우스, 대표적인 민중파였던 마리우스와 카이사르,


마리우스가 술라에 패하게 되면서 로마에 머물수 없었던 카이사르는 


소아시아, 아프리카 등의 로마 밖에서 군사적, 정치적인 다양한 경험을 쌓게 되고


술라 사후 로마로 돌아온 카이사르는 벌족파였던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를 화해시키는 명분으로


삼두 정치를 완성시키며 입지를 굳혔으며, 갈리아 전쟁으로 부와 명성을 쌓고 로마로 돌아오던 중


원로원과 폼페이우스의 견제로 돌아올 수 없는 강 루비콘 강을 건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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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시저)의 진격



출처 : flickr



루비콘 강을 건넌 카이사르는 아리미눔에서 폼페이우스의 부하 루키우스를 만나게 됩니다.


카이사르는 양측의 군대 해산과 폼페이우스의 히스파니아 속주로의 이동, 직접 회담 요청을 제안하지만


폼페이우스는 직접 회담 요청을 거절하고 이에 실망한 카이사르는 진격을 이어나가게 됩니다.


아레티움, 이구비움, 아묵시움 등의 피케늄 지역 전역이 카이사르의 편에 서게 됩니다.



코르피니움에서 카이사르에 맞서 싸우기로 결정한 에노발루스는 폼페이우스에게 서신을 보내


함께 합류하여 코르피니움에서 카이사르와 전쟁을 하자고 하지만 폼페이우스는 에노발루스에게 


성을 버리고 자신이 있는 곳으로 군대를 이동해 합류하라고 답을 합니다.


성이 카이사르에게 포위되 지원군을 기다리던 에노발루스는 몰래 성을 빠져나갈 계획을 세우지만


병사들에게 발각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고, 병사들은 성문을 열어 카이사르를 맞이하게 됩니다.


폼페이우스와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빠른 진격에 이탈리아를 떠나 그리스로 이동하게 됩니다.



카이사르(시저)와 폼페이우스, 파르살루스 전투



출처 : wikimedia



로마 해군의 제왕이라 불리던 폼페이우스는 그리스에서 세력을 규합합니다.


보병 약 2만과 기병 약 1천의 카이사르 군대와 


보병 약 4만 5천과 기병 약 7천의 폼페이우스의 군대가 파르살루스 언덕에서 만나게 됩니다.


카이사르는 보병과 기병 모두에서 수적인 열세였습니다.


하지만 카이사르의 군대는 폼페이우스의 군대에 비해 실전 경험으로 다져진 최정예 병사들이었습니다.



카이사르(시저)는 최정예 보병 2천명을 별동대로 편성합니다.


카이사르 기병대 1천기는 폼페이우스의 기병대를 도발하며 작전 지역으로 유인하였고


작전 지역에 매복하던 2천명의 별동대는 일제히 폼페이우스의 기병대를 포위하며 무력화 시키는데 성공합니다.


기병이 무너진 폼페이우스의 군대를 카이사르의 보병이 우회하여 포위하면서 섬멸전이 시작됩니다.


파르살루스 전투는 카이사르의 승리로 끝나게 되며 사실상의 내전은 종식되게 됩니다.



폼페이우스의 죽음과 클레오파트라



출처 : flickr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패한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피신하게 됩니다.


당시 이집트는 프톨레이마오스 13세 - 클레오파트라 7세 시대였습니다.


프톨레이마오스 13세의 명령을 받은 전직 로마군 장교에 의해 폼페이우스는 암살을 당하게 됩니다.



폼페이우스 살해를 빌미로 카이사르는 이집트를 평정하고 클레오파트라를 파라오에 앉히게 됩니다.


당시 곡물과 황금이 넘쳐나던 부의 원천 이집트, 그리고 이집트의 파라오 클레오파트라와의 혼인이 정략 결혼이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카이사르는 클레오파트라와의 혼인으로 부와 카이사리온이라는 아들을 모두 얻게 됩니다. 


폼페이우스의 죽음으로 로마 내전은 종식되었으며 카이사르는 로마를 장악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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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에 걸친 갈리아 전쟁이 끝나게 됩니다.



카이사르(시저)는 기원전 58년 헬베티족 공격을 시작으로, 


기원전 51년 베르켄게토릭스의 갈리아 연합을 제압하면서 모든 갈리아 지역을 패권하에 넣습니다.  


카이사르의 군사적 명성은 하늘을 찌를 듯 높았으며, 카이사르는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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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삼두정치, 크라수스의 죽음



출처 : wikimedia



카이사르, 폼페이우스, 크라수스로 이루어진 로마 제 1대 삼두정치크라수스의 죽음으로 깨지게 됩니다.



로마 역사상 최대의 부호로 알려져 있는 크라수스는,


마리우스와 술라의 로마 내전 기간에 술라의 편에 서며 술라의 협력자로 공을 세우게 됩니다.


술라의 내전 승리로 크라수스는 마리우스파의 재산을 빼앗고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데 집중합니다.


엄청난 재산을 모은 크라수스의 걸림돌은 군사적 업적의 부재였습니다.


로마의 공직에 오르기 위해서는 군사적 업적이 필수였지만,


크라수스의 라이벌인 폼페이우스에 비해 군사적 업적이 없던 크라수스는 로마의 공직에 오를 수 있는 가능성이 희박했습니다.



기원전 55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를 뛰어 넘는 군사적 업적을 이루기 위해 크라수스는 파르티아 전쟁을 지휘합니다.


파르티아는 오늘날 이란, 이라크, 터키 동부, 사우디 아라비아, 파키스탄에 이르는 지역을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파르티아 전쟁에서 크라수스는 패하게 되고 파르티아 왕에게 붙잡혀 죽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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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



출처 : wikipedia



로마 제 1대 삼두정치를 이끌던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시저)의 딸과 혼인을 하며 카이사르와 동맹을 맺었지만,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중 카이사르의 딸 율리아가 사망하며 폼페이우스와의 동맹은 균열이 시작됩니다.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는 장인과 사위의 관계에서 라이벌이 됩니다.



기원전 50년, 갈리아 원정을 성공적으로 마친 카이사르는 기원전 49년에 있을 집정관 선거를 위해


북이탈리아 도시를 방문하며 선거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가 당시 로마에 있지 않고 루비콘 강 북쪽에 있었기 때문에 로마 부재 중 집정관 입후보를 원로원에 요청했지만


폼페이우스를 앞세운 원로원은 카이사르의 요구를 거절합니다.


원로원은 카이사르에게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귀환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원로원의 이러한 대우가 부당하다고 생각한 카이사르는 자신과 자신의 병사들을 지키기 위해 전쟁을 할것이라 선포합니다.


자신들의 총사령관인 카이사르를 위해 언제든 싸울 준비가 되어 있던 병사들은 카이사르를 따르겠노라 선언합니다.



루비콘 강





로마 본토와 속주를 나누는 경계선인 이탈리아 북쪽의 루비콘 강은 원정을 나간 로마 군인들이 로마로 귀환할 시,


무장을 해제한 후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들어와야 했습니다.


로마군은 무장을 한 채로 루비콘 강을 건널 수 없는 불문율이 있었습니다.



기원전 49년 1월 12일, 카이사르는 1개의 군단을 이끌고 루비콘 강을 건너기 시작합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이 강을 건너면 인간 세계가 비참해지고, 건너지 않으면 내가 파멸한다.


나아가자. 신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우리의 명예를 더럽힌 적이 없는 곳으로. 주사위는 던져졌다"


마리우스와 술라의 로마 내전 이후 또 다른 로마 내전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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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두정치를 완성시킨 카이사르는 갈리아 정복을 위해 출정합니다.



수 많은 빚을 청산하고 로마에서의 입지를 굳건히 다지기 위한 의도였습니다.


로마 최대의 빚쟁이였던 카이사르는 갈리아 원정이 끝난 후,


모든 빚을 탕감하였으며 엄청난 부를 거머쥐게 됩니다.


또한 군사적 명성까지 쌓으면서 명실상부 로마의 1인자로 등극하게 됩니다.


카이사르의 성장




갈리아



출처 : wikimedia



갈리아는 현재의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서부, 라인강 서쪽의 독일을 포함하는 광활한 지역입니다.


벨기에인인 벨가이, 갈리아인인 갈리, 켈트인인 켈타이, 아키텐인인 아퀴타니로 나뉩니다.


갈리아인은 100여개의 부족과 1200만명의 인구로 구성이 되어 있었습니다.


갈리아는 농업과 목축이 고루 발달되어 있었으며 식량이 넉넉하고 상업 또한 발달되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의 독일, 라인강 동쪽의 게르만족과 충돌이 잦았으며 로마인들은 갈리아인들을 미개하고 원시적이라 생각했습니다.





갈리아 전쟁 시작



현재의 스위스인이자 스위스 원주민이었던 헬베티족은 게르만족의 침략을 피해 남하하고 있었습니다.


약 30만명 정도의 헬베티족은 남하하던 중 로마 속주를 침입하게 됩니다.


침입을 당한 하이두이족은 로마에 도움을 요청하게 되고, 카이사르는 이를 받아들여 오늘날 손강이라고 불리는


아라르강에서 헬베티족을 저지하고 고향으로 돌려보내게 됩니다.


헬베티족을 저지했지만, 카이사르의 로마군은 게르만족과 만나게 됩니다.  


라인강 근처에서 벌어진 로마군과 게르만족의 전투에서 로마군은 12만명의 게르만족을 물리치며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갈리아 전쟁



갈리아 전쟁 2년차, 기원전 57년, 벨기에인인 벨가이족의 움직임이 시작됩니다.


로마군과 갈리아 기병 총 5만을 이끌고 카이사르는 알프스를 넘게 됩니다.


수에시오네스의 족장인 갈바를 중심으로 벨가이 동맹 29만명이 운집했으며, 로마를 선제 공격할 준비를 합니다.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로마군은 누미디아 기병, 크레타 궁수, 마요르카 투석병을 전략적으로 잘 활용하여 승리합니다.



벨가이 동맹은 해체되어 도망가기 바빴으며, 벨가이 동맹을 격파한 카이사르는 북쪽으로 진군합니다.


벨로바키족, 암비니아족을 거쳐 갈리아 북동부 최강자로 알려진 네르비족을 향해 진격합니다.


네르비족을 몰살시킨 카이사르는 갈리아 북동부 일대를 평정합니다.


게르만족과의 일전을 치른 카이사르는 기원전 55년과 54년 브리타니아를 침공합니다.


브리타니아의 강화 요청을 받아들인 카이사르는 다시 갈리아로 귀환하게 됩니다.



갈리아 전쟁의 끝



출처 : wikimedia



갈리아 원정 7년차, 기원전 52년, 갈리아 민족들이 처음으로 단결을 하여 로마군에 반기를 들게 됩니다.


아르베르니족의 족장 베르켄게토릭스가 중부 갈리아의 대부분의 부족을 설득하고, 연합군을 만들게 됩니다.


아르베르니족은 현재의 프랑스 남동부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습니다.     



부족과의 단합 실패를 갈리아 부족의 약점으로 파악했던 베르켄게토릭스는 부족의 단합과 궐기를 최우선 목표로 삼고,


기병보다 느린 보병 중심의 전략과 적은 군사 규모를 로마군의 약점으로 파악합니다.


또한 보급에 문제가 있었던 로마군의 식량을 완전히 차단하기 위해, 


로마군에 군량을 대는 갈리아 부족을 배신시킬 작전을 세우게 됩니다.



위기에 처한 카이사르는 청야 전술을 사용하던 갈리아 부족 도시 중 하나인 아바리쿰을 점령하면서 식량난을 해결합니다.


현재의 프랑스 디종 부근 구릉지대에 지어진 성채도시 알레시아에서 마지막 전투를 맞은,


카이사르와 베르켄게토릭스의 전투에서 카이사르가 승리하게 되며 갈리아 원정은 끝이나게 됩니다.



갈리아를 정복한 카이사르는 돌이킬수 없는 강, 루비콘 강을 건너며 로마 내전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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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화정 말기의 로마에서는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하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의 고모부였던 가이우스 마리우스는 7번이나 집정관에 당선되었던,


로마 공화정의 장군이자 정치가였습니다. 


마리우스는 로마가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변화하는데 중대한 역할을 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마리우스의 라이벌이자 최대 정적이었던 루키우스 코르넬리우스 술라


한때 마리우스의 부하로 수많은 전쟁에 함께 참전하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유구르타 전쟁 이후 마리우스와 술라의 사이는 벌어지게 되며, 한쪽이 사라져야만 하는 비극으로 치닫게 됩니다.


▶마리우스와 술라 확인하기





벌족파와 민중파



 

 벌족파

 민중파

 대표 인물

 술라, 브루투스

 마리우스, 그라쿠스 형제

 정치

원로원의 전통적인 경로를 통해

정치적 목적을 추구

전통적인 방식 대신

유권자에게 직접 호소

 라틴어

 optimates

 populares



벌족파와 민중파의 대립은 카이사르의 가문에게도 매우 큰 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율리우스 씨족 가문의 귀족 집안이었던 카이사르가는 전통적으로 벌족파에 속해 있었지만,


카이사르의 고모부인 마리우스는 민중파의 대표 인물이었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민중파에 속하게 되고,


술라가 로마 내전을 종식시키고 로마를 장악하였을 때 카이사르 역시 술라의 숙청 대상이 됩니다.



카이사르의 유산과 사제직, 아내의 지참금 덕분에 처형은 면하게 됩니다.


민중파였던 킨나의 딸과 결혼을 한 카이사르에게 술라는 이혼을 요구하지만, 


카이사르는 술라의 요구를 거절하고 소아시아 지방으로 도망치게 됩니다. 



카이사르의 성장





소아시아로 도망친 카이사르는 아시아 속주 미누키우스의 진영에 입대를 신청하고,


킬리키아 군단으로 이전하여 복무를 하게됩니다.


이곳에서 군 경력을 쌓은 카이사르는 기원전 78년 술라의 사망 소식을 듣고 로마로 돌아오게 됩니다.


23살의 카이사르는 로마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합니다.


변호사는 로마 정계 진출의 유력한 수단 중 하나였기 때문입니다.


수사학을 완성하기 위해 기원전 75년 카이사르는 키케로의 스승이 있는 로도스섬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기원전 74년 카이사르는 비타니아 지방의 총독으로 부임한 외삼촌 아우렐리우스 코타를 찾아가고,


얼마 후 사망한 외삼촌의 뒤를 이어 카이사르가 총독으로 임명됩니다.


이후 회계감사관으로 선출되어 히스파니아로 이동하고, 히스파니아에서 돌아온 카이사르는


마리아스 부인의 제사 추모 연설을 하며 민중파의 거두로 등장하게 됩니다. 



기원전 65년, 35세의 나이로 안찰관에 선출되고 기원전 63년 최고 제사장에 당선됩니다.



기원전 60년, 로마 원로원에 불만을 품은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는 크라수스를 끌어들여 삼두정치를 시작하게 됩니다.


일설에는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사이가 좋지 않아, 


이를 중재하겠다는 명분으로 카이사르가 원로원을 설득시켜 삼두정치가 시작되었다고도 합니다.


민중파의 대표 카이사르, 강력한 군의 중심과 재력 폼페이우스, 기사 계급의 대표 크라수스가 손을 잡았으며


카이사르는 집정관에 당선되게 됩니다.


많은 빚을 지고 있던 카이사르는 빚의 해결과 입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 갈리아 원정을 준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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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는 정치와 종교, 로마법으로 세계를 3번 통일했다고 합니다.



서양 문명과 문화, 경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로마는 기독교 제국의 시작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로마는 현재 이탈리아의 수도로 고대에는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마을이었습니다.


수백년 동안의 확장과 발전을 거듭하며 도시 국가를 탈피해 지중해를 정복하고 대제국으로 발전합니다.


로마 제국을 이야기할 때 수많은 정치가, 장군, 웅변가들이 등장하는데,


특히 율리우스 카이사르를 빼 놓고는 로마 제국을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3차 포에니 전쟁 확인하기

▶2차 포에니 전쟁 확인하기

▶1차 포에니 전쟁 확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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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우스 카이사르 가문의 성장



출처 : Ancient Origin / gaius marius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로마 제국의 기초를 쌓은 인물 중 한명입니다.


독일어의 황제를 지칭하는 카이저의 어원, 러시아 황제를 일컫는 차르의 어원이 모두


율리어스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에서의 승리로 지중해 패권을 장악하게 된 로마,


그리고 46년이 지난 기원전 100년 카이사르가 태어납니다.


카이사르의 가문은 귀족이었지만 로마 공화국의 고위직을 독점하는 가문은 아니었습니다.


카이사르의 할아버지인 가이우스는 시골 평민 출신이었던 마리우스를 사위로 삼게 되었는데,


이것이 카이사르 가문의 운명을 변화시킵니다.


마리우스는 부자였지만 시골 출신이었고 그에게는 가문의 이름이 부족했기에, 


카이사르가와의 혼인은 그에게도 도움이 되는 선택이었습니다.



이후 마리우스는 집정관직에 올라 게르만족의 침입을 막고 유구르타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승승장구합니다.


마리우스의 공적과 재산을 등에 업은 카이사르가는 드디어 고위직으로의 진출이 열리게 됩니다. 


카이사르의 삼촌과 오촌 당숙이 집정관을 지냈으며 카이사르의 아버지 역시 법무관을 지냅니다.





마리우스와 술라



출처 : wikipedia



카이사르가와의 혼인과 마리우스 본인의 능력, 재산으로 로마에서 마리우스의 명성과 인기는 하늘을 치솟습니다.


카이사르가 태어나기 전인 기원전 107년, 당시 집정관이었던 마리우스는 재무관에 선출된 술라와 함께


누미디아 왕국에 파병되어 누미디아 정복 전쟁인 유구르타 전쟁을 치르게 됩니다.


기병을 이끈 술라는 누미디아 왕국과 누미디아의 연합군이었던 마우레타니아의 보병대를 격파하고,


누미디아의 본대를 함락시켰으며 누미디아의 수도까지 함락시키게 됩니다.


하지만 로마 포룸에 승리를 기원하는 조각이 새겨졌는데, 집정관인 마리우스는 묘사되지 않고 술라만 묘사되게 됩니다. 


나아가 세력가들이 다툼과 음모로 마리우스와 술라의 사이는 벌어지게 됩니다.



카이사르가 태어나기 한 해 전인 기원전 101년, 이탈리아 반도에 게르만족이 침략합니다.


마리우스의 밑에서 일했던 술라는 이 킴브리 전투에서 다른 집정관의 휘하에 속해 전투를 진행합니다.


마리우스와 술라의 사이가 매우 안 좋았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게르만족과의 킴브리 전쟁에서 술라는 매우 뛰어난 활약을 보이며 게르만족을 격파하고 로마의 법무관으로 선출됩니다.


그 후 술라는 원로원 의원이 되며 마리우스를 적대하는 옵티마테스파의 일원이 됩니다.



기원전 91년 동맹시 전쟁이 시작되며 마리우스와 술라는 로마군을 지휘하게 되는데,


둘의 마지막 합동 작전인 마르시족과의 전투를 끝으로 로마의 패권을 잡기위한 영원한 라이벌로 각자의 길을 가게 됩니다.



카이사르의 고모부였던 마리우스의 영향으로 카이사르 가문은 성장했지만 


마리우스의 라이벌 술라의 최종 승리로 인해 카이사르 가문이 위기에 빠졌으며,


술라의 첫 부인이 율리우스 가문 출신이었기 때문에 카이사르 가문이 숙청에서 살아남았던 점 등은


카이사르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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