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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 시대는 중세 유럽사의 시기 중 하나입니다.



현재의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은 바이킹의 후예라고 불리며


또한 스스로 본인들을 바이킹의 후예라 칭하고 있습니다.


스칸디나비아는 바이킹의 고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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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의 어원



바이킹의 어원은 불분명합니다.


작은 만이나 산길이나 물길이 굽어져 휘어진 곳을 뜻하는 고대 노르드어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스웨덴과 덴마크 사이의 해협을 비켄 Viken이라고 부르는데 이 지역 사람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바이킹의 역사



출처 : flickr



기원전 1,700년경부터 고대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청동기 문화가 발달했습니다.


700년경에는 농경 문화가 발달하여 농경을 위주로 삶을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척박한 땅으로 인해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많이 않았으며 인구가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식량이 부족하게 되고, 이는 부족간의 싸움을 야기시키며 바이킹의 전투력을 상승시키게 됩니다.


강한 전투력을 바탕으로 무장된 바이킹들은 본격적으로 유럽 전역으로 진출하며 약탈과 침략을 시작하게 됩니다.


 


바이킹 문화



출처 : wikimedia



바이킹은 약탈자로 알려져 있지만 무역과 장사도 겸하고 있었습니다.


퀼트과 뜨개질에도 뛰어났으며 수공업, 금속 가공, 목공예 등도 매우 발달되어 있었습니다.


바이킹 마을에는 대장간과 각종 수공예 상점 등이 고루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당시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는 스칸디나비아를 비롯한 북유럽의 문화를 미개하고 야만적이라 생각했지만


바이킹의 문화는 매우 실용적이었으며 예술적 감각도 더해져 있었습니다.



숯을 사용하여 철에 탄소의 함량을 높여 더욱 단단한 철 제품을 생산하였으며,


이러한 철 생산품들은 나중에 유럽의 표준으로 자리매김합니다.


반지의 제왕에서 손재주 있는 지하의 대장장이로 그려지는 드워프 캐릭터 역시


북유럽 신화의 난쟁이 드베르그에서 유래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바이킹의 배 역시 날렵한 선체로 설계가 되었으며 배 밑에 선체를 받치는 길고 큰 나무 조각인 용골을 붙여,


거친 물살에서의 흔들림을 최소화 하고 조종하기 쉽게 합니다.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북해의 바다를 장악했으며 강에서도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기동성을 갖추었습니다.



바이킹은 항해술도 뛰어났습니다.


당시에는 나침반이 발명되기 전의 시기였으며 바이킹은 하늘의 해, 달, 별을 관측하며 항해를 합니다.


항로를 이탈했을시에는 갈까마귀를 이용하여 육지를 찾아 항로를 찾아 이동합니다.


갈까마귀는 육지를 향해 날아가는 습성이 있어 갈까마귀를 날려 뒤를 따라 이동하는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대항해시대 이전까지 바이킹배는 유럽 최강의 배로 유럽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오늘날의 뷔페 또한 바이킹에서 유래된 음식으로,


전쟁을 나갔다가 돌아온 바이킹 전사들이 모여 마음껏 음식을 먹는 문화에서 유래되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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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두정치파는 필리피 전투에서 암살파 / 공화파에게 승리를 합니다.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는 로마 영토를 분할 통치하게 됩니다.


로마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반도를 통치하게 된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안토니우스는 이집트, 마케도니아, 그리스 등의 로마 속령을 통치하게 됩니다.


표면적으로 보면 옥타비아누스가 차지한 곳은 작은 이탈리아 반도 뿐,


상대적으로 더 넓은 영토와 갈리아 군단, 곡물과 자원의 요충지인 이집트까지 차지한 안토니우스가 유리한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옥타비아누스의 치밀한 계략으로, 안토니우스를 로마 외곽으로 내보내


이탈리아 반도 내에서의 안토니우스 입지를 약화시키려는 의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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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 동맹과 파기



안토니우스의 부인 풀비아 사망 후 기원전 40년, 


옥타비아누스는 자신의 누이 옥타비아를 안토니우스에게 시집을 보냅니다.


이로 인해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에 확고한 동맹 관계가 형성되는 듯 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이집트에서 클레오파트라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던 안토니우스는,


경제적, 군사적 지원을 위해 이집트에 다녀오겠다고 한 뒤 옥타비아에게 결혼을 끝내자는 편지를 보냅니다.


혼인 동맹은 파기됩니다.



안토니우스의 실수



전략적으로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보다 앞섰지만 안토니우스는 결정적인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클레오파트라와의 정식 결혼으로 로마 시민들의 인심을 잃어버리게 되며,


로마의 왕이 아닌 아집트의 왕이 되어 이집트 중심의 제국을 세우려 한다는 악소문이 퍼지게 됩니다.


아르메니아 왕국을 평정한 안토니우스는 개선식을 로마가 아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거행하며


로마인들의 반감을 사게 됩니다.



안토니우스의 편이었던 갈리아 사령관의 죽음 이후, 옥타비아누스는 삼두 정치의 룰을 무시하고 


재빨리 자신의 사람을 갈리우스 사령관으로 임명해버립니다.   


또한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가 이집트에 묻히고 싶다고 했다는 말을 퍼트리며 인심을 떨어뜨리는 소문을 퍼트립니다.



로마의 민심을 잃고 갈리아 군단의 지지를 잃어버린 안토니우스는 사면초가에 빠지게 됩니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던 안토니우스는 옥타비아누스와의 결전을 준비하고,


철저한 계획과 준비로 자신감이 상승한 옥타비아누스 역시 안토니우스와의 일전을 준비합니다.



악티움 해전



출처 : wikipedia



로마 내전 최후의 결전인 악티움 해전이 발발합니다.


안토니우스는 5단 노선, 8단 노선, 10단 노선의 대형 군선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아그리파를 해전 지휘관으로 임명했으며, 


아그리파는 대형 군선 대신 소형 군선을 전투에 투입하여 기동성과 민첩성으로 전투를 지휘합니다.


훈련도가 낮은 이집트 해군을 주축으로 출정한 안토니우스는, 


훈련도가 높고 완전 편대 함대를 이끈 아그리파의 해군과 그리스 북서부 악티움에서 만나게 됩니다.



아그리파는 안토니우스 해군의 좌우 보급로를 차단하며 항구를 봉쇄한 뒤,


빠른 리부르나를 이용하여 안토니우스 대형 군선의 노와 방향타를 파괴합니다.


또한 공성무기인 발리스타를 이용하여 불화살을 계속 발사하며 견제를 합니다.


전세가 불리해진 안토니우스는 이집트로 피신했지만 자신의 로마 병사를 두고 클레오파트라를 따라 도망간


안토니우스의 신망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고 로마에서의 권위와 신뢰를 잃은 안토니우스는 결국 자살을 선택합니다.


악티움 해전에서의 승리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 공화정의 최고 권력자로 우뚝 서게 됩니다.



드디어 로마 제 1대 황제 옥타비아누스의 시대가 열리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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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유언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후계자가 됩니다.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가 암살 당할 때 옥타비아누스는 18세였으며


일리리아의 아폴로니아에서 군사 훈련과 공부를 병행하고 있었습니다.


기원전 44년 5월 6일, 로마에 도착한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의 집정관이자 카이사르의 가장 충성스러운 부하였던 안토니우스를 만나게 됩니다.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르의 유언에 따른 후계자인 옥타비아누스를 인정하지 않았지만


카이사르 군단의 옥타비아누스 지지에 동맹을 선택하게 됩니다.


▶카이사르 유언장 확인하기





제 2차 삼두 정치



출처 : short history website



기원전 43년 10월, 옥타비아누스, 안토니우스, 레피두스는 제 2차 삼두 정치를 결성합니다.


사실상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이두 정치입니다.


3명의 집정관은 카이사르 암살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300명의 원로원 의원과 2,000명의 기사 계급 출신을


범법자로 규정하고 재산을 몰수하고 추방 명령을 내리게 됩니다.



카이사르 암살파의 주요 인물인 브루투스 역시 마케도니아 속주 총독 자격으로 도망치듯 로마를 떠나


그리스에서 암살 공모자 카시우스와 함께 군사를 모집하게 됩니다.


로마 서방 세력인 삼두정치파와 로마 동방 세력인 암살파 / 공화파의 내전이 시작됩니다.


▶1차 삼두정치 확인하기



로마 내전, 필리피 전투



출처 : wikimedia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삼두정치파, 브루투스와 카시우스의 암살파는 


각기 세력을 규합하고 군대를 정비하며 로마 내전을 준비합니다.


삼두정치파는 22개 군단, 보병 약 10만명, 기병 약 1만기를


암살파 / 공화파는 19개 군단, 보병 약 7만명, 기병 약 2만기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필리피는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사이의 트라키아 지방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군사 도로 에그나티아 가도에 위치하고 있어 요충지였으며,


도로 양쪽에 자리한 두 개의 언덕과 숲과 늪지로 이루어진 지리적 이점으로 방어에 유리한 지형이었습니다.


암살파가 필리피를 전투 지역으로 선정한 이유는 보급에 유리했고 장기전으로 가면 승산이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양측은 모두 로마군이었기 때문에 전술, 지휘 등이 표준화 되어있어 전력은 막상막하였습니다.


1차 필리피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 군대를 급습해 승기를 잡은 브루투스는 안토니우스의 후방 부대까지 습격합니다.


브루투스의 활약으로 1차 필리피 전투는 암살파가 승리했지만 암살파의 장군 카시우스는 돌연 자살을 합니다.


장군 카시우스의 자살로 사기가 떨어진 암살파는 2차 전투에서 삼두 정치파에 패하게 되고 브루투스 역시 자살을 택합니다.



필리피 전투로 암살파 / 공화파를 물리친 삼두 정치파는 집정관들 사이의 새로운 영토 협정을 맺게 됩니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존재할 수 없듯이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의 본격적인 로마 패권 다툼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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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죽음은 로마 시민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믿었던 부하 브루투스에게 배신당하며 살해된 로마 최고의 권력자 카이사르,


역사의 배신자로 낙인찍힌 브루투스의 명분은 공화정 수호와 독재자 처단이었습니다.


로마 시민들 앞에서 연설을 시작한 브루투스는 자신의 행동의 정당성을 주장하지만,


로마 시민들의 반응은 차가웠으며 카이사르 암살파 일당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합니다.


분노한 시민들을 피해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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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후계자



출처 : wikimedia



카이사르(시저)의 장례식이 끝난 후 로마 시민들의 관심은 누가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될 것인가 였습니다.


후보자는 두 명으로 압축되었고, 한 명은 카이사르의 평생의 동지이자 갈리아 전쟁을 함께 한 장군 안토니우스,


그리고 다른 후보자는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의 아들 카이사리온이었습니다.


당시 나이가 9세에 불과했던 카이사리온은 후계자로 임명될 수 없었기에,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후계자가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당시 안토니우스는 38세로 로마의 집정관이었고 자타공인 카이사르의 오른팔이었습니다.



하지만, 카이사르 암살 6개월 전에 작성된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 되었고


카이사르는 후계자로 옥타비아누스를 임명합니다.



카이사르(시저) 유언장



출처 : wikimedia



기원전 45년 9월, 이탈리아로 돌아오던 카이사르는 미리 유언장을 작성해 놓습니다.


자신의 조카 손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에게 재산과 이름을 상속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안토니우스와 브루투스를 유언의 공동 집행자로 지명합니다.


또한 카이사르 자신이 죽기 전에 옥타비아누스가 죽는다면 브루투스가 다음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적습니다.



타고난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카이사르(시저)는 자신의 다음 세대에 필요한 리더는 탁월한 정치가라고 판단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 한니발, 카이사르를 거치며 수많은 전쟁이 난무했던 시기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나라의 내정과 기틀을 바로 잡을 정치가가 나라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18세였던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카이사르 애인의 아들이었던 브루투스는 정치적 능력이 뛰어난 인물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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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시저) 유언장 내용



1. 카이사르 소유 재산의 3/4은 가이아스 옥타비우스와 아티아의 아들인 옥타비아누스에게 남긴다.


5. 제 1 상속인 옥타비아누스는 상속과 동시에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고, 아들이 된 이후에는 카이사르라는 성을 이어받는다.


6. 수도에 사는 로마 시민들에게는 1인당 300세스테르티우스씩 주고, 


테레베 강 서안에 있는 카이사르 소유의 정원을 시민들에게 기증한다.



300세스테르티우스는 당시 로마 일반 시민 월급의 몇 개월 치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카이사르의 유산에서 로마 시민에게 1인당 300세스테르티우스를 주고 나면 사실 유산은 거의 남지 않기 때문에,


유산은 큰 의미가 없었지만 로마 최고의 권위를 가진 카이사르라는 성을 이어 받는 것은 강력한 힘을 부여 받는 것입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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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아 전쟁과 로마 내전을 모두 승리한 카이사르는 


명실상부 로마의 1인자로 등극하게 됩니다.



폼페이우스가 죽고 카이사르(시저)는 폼페이우스의 잔여 세력을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중동 지역에서의 젤라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었고 아프리카의 루스피나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기원전 45년 히스파니아의 문다 전투에서 승리하며 마지막 저항군을 격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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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 원로원과 호민관



출처 : public domain



로마는 왕이나 황제가 없는 공화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에 의한 독재를 막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로마는 원로원이라는 체제를 통해 외교, 정치, 재정의 결정권을 수행하였으며 서로를 견제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원로원은 귀족들의 집합체로, 10년여간의 로마군 복무 경험이 필수였습니다.


300명으로 구성된 원로원은 술라 시대를 거치면서 600명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수백명으로 구성된 원로원의 의견 취합을 위해, 원로원의 리더를 집정관으로 뽑고 임기를 1년으로 합니다.


독재를 막기 위해 집정관은 총 2명을 뽑았으며, 


두 명의 집정관 의견이 다를 경우를 대비해 임기 6개월의 집정관의 리더 독재관을 뽑게 됩니다.


로마에 긴박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독재관은 모든 결정을 단독으로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갖게됩니다.



로마에는 귀족이 아닌 평민을 위한 관직인 호민관도 존재했습니다.


호민관은 오직 평민을 위한 관직으로 평민 계급에서만 선출될 수 있었고, 


원로원에서 정한 법률이나 정책이 평민들에게 불이익이 있다고 판단되면 무조건 반대할 수 있는 권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평민 출신인 사람이 호민관이 되면 호민관을 거쳐 원로원의 구성원이 됩니다.



카이사르(시저) 암살의 원인



출처 : wikimedia



문다 전투 승리 이후 카이사르는 로마로 입성합니다.


갈리아 정복내전 승리로 인해 카이사르의 명성과 업적은 하늘을 찌를 듯 했으며


모든 로마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와 존경을 얻게 됩니다.



기원전 46년, 6개월 임기의 독재관 임기규정을 10년으로 바꾸며 독재관에 취임하게 되며 각종 개혁을 실시합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원로원과 민회로부터 종신 독재관에 임명됩니다.


종신 독재관에 임명된 카이사르의 절대 권력은 오히려 독이 됩니다.



종신 독재관에 임명된 한달 후,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시저)는 암살당하게 됩니다.


암살파에는 갈리아 원정을 함께 했던 군단장 포함, 카이사르의 부하들도 가담합니다.


카이사르 암살의 주축이었던 브루투스는 카이사르가 황제가 되려고 했기에 죽였다고 연설합니다.


카이사르(시저) 암살에 가담한 인원은 60명 혹은 그 이상이라고 하며 총 23번의 칼에 찔려 죽음을 맞이합니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공화정의 종말을 야기했으며, 로마 민중의 슬픔과 분노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로마 제 1대 황제 옥타비아누스가 역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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