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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선제 공격을 핑계로 허위 선전 하며 북한군은 남침합니다.



소련에서 지원 받은 최신형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개성 방어선을 격파하고,


오전에 동두천과 포천을 함락, 26일 의정부, 27일 서울 도봉구의 창동 방어선을 함락시킵니다.


6월 28일 새벽, 서울 시내가 북한군에 의해 점령당하게 됩니다.


▶6.25 전쟁의 시작 확인하기





한강 대교 폭파, 북한군의 서울 점령



출처 : goodfreephotos



6월 28일 0시, 북한군은 이미 서울 인근의 미아리까지 들어왔고 서울 시민들은 피난길에 오릅니다.


전황에 밀리던 대한민국 국군 역시 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후퇴를 시작합니다.



6월 28일 새벽 2시, 대한민국 국군은 후퇴로인 한강 철교와 한강 대교를 스스로 폭파합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서울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육성이 녹음된 방송이 27일 밤 10시에 나갔고, 


서울 시민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에 남아 직접 방송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서울을 지키라는 방송을 듣고 이를 믿어 피난을 떠나지 않은 서울 시민들은


한강의 다리들이 폭파되어 피난을 떠날 수 없었으며 북한군에 의해 서울이 점령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10만이 넘는 시민들이 피살되거나 북으로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무고한 시민들을 거짓말로 속이고 혼자서 도망친 이승만에 대한 언행은 참으로 깊은 탄식을 불러 일으킵니다.



한강 대교의 폭파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과 논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일각에서는 한강 대교의 폭파로 인해 파죽지세였던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고 우리 국군의 전열을 정하며,


유엔군이 한국 전쟁에 개입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줬다고 평가합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무고한 시민들을 사지로 내몰았으며,


국군의 전열 정비가 아닌 이미 와해된 우리 군의 사기를 꺾고 한강 북단에 고립된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았다고 합니다.


이승만은 27일 대전으로 피신, 대구, 익산, 목포를 거쳐 7월 2일 부산항에 도착합니다.



한강 대교를 폭파한 우리 국군은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6일 동안 북한군을 저지합니다.



춘천-홍천 전투



출처 : flickr



북한군의 진격은 그들의 예상처럼 순조롭게 진행이 되지 못합니다.


서울을 함락한 북한군을 한강 대교와 철교를 폭파하며 저지시킨 한강 대교 폭파 사건도 있었지만,


동부 전선의 춘천-홍천 전투에서의 우리 국군의 활약과 대승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북한군의 진격을 무려 3일이나 저지했으며 북한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전쟁이 길어질 경우 미군의 개입으로 인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던 김일성은, 


단기간 내에 남한을 정복한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춘천지역에서 막히며 실패하게 됩니다.


강원도 춘천, 홍전, 인제에서 고전하던 북한군은 계획에 큰 차질에 생기게 됩니다.


춘천-홍천 전투에서의 북한군 3일 지연은 북한군에게 마우 큰 악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게다가 한강을 도하하지 못하면서 시간이 지체되고, 그 사이 유엔군의 파병이 가능해집니다. 


또한 남한의 국군을 섬멸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밀어내게 되면서 국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정비할 시간을 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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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은 한국 전쟁으로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됩니다.



제 2차 세계 대전 종결과 함께 미국과 소련의 냉전 구도가 폭발한 사례 중 하나입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약 3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전쟁의 종전이 아닌 정전이며 아직까지도 휴전 상태인 세계사에 유래없이 긴 휴전입니다.


남한에는 미국영국, 캐나다, 호주, 터키, 태국, 콜롬비아 등의 유엔 16개국에서 전투군을 파견했으며,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인도, 이탈리아, 서독의 6개 나라에서 의료지원군을 파견합니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공산군 지원과 동독, 체코 등의 5개국의 의료 지원군을 지원받습니다.


▶ 제 2차 세계 대전 알아보기                                  ▶ 터키 환율, 화폐 알아보기

▶ 미국 달러 환율, 화폐 알아보기                             태국 환율, 화폐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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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시작, 6.25 전쟁



출처 : wikimedia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포성이 평화로운 새벽을 뒤흔듭니다.


전쟁의 주 원인은 김일성의 남침 야욕으로, 북한군은 38도선 전역에 걸쳐 일제히 남침을 개시합니다.


1949년 6월 말, 주한 미군은 남한에서의 철수를 완료하게 되고,


1950년 6월 25일 이전까지 1,000여 회 이상의 수 많은 국지전이 38도 경계선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미군이 철수한 남한의 상황을 지켜보며 탐색, 도발하던 북한군은 선전포고 없는 기습을 실행합니다.


당시 남한과 북한의 병력차이는 약 2배 정도로 북한의 병력이 남한보다 앞서고 있었습니다.


또한 전쟁 장비 역시 북한이 압도적이었으며 당시 남한에는 전차가 한 대도 있지 않았습니다.


남한군은 장비 및 무기, 보급의 부족으로 질적, 양적으로 매우 열세에 놓여 있었습니다.



애치슨 라인



출처 : wikipedia



1950년 1월 미국은 애치슨 라인 Acheson Declaration에서 한국을 방위 지역에서 제외합니다.


애치슨 라인은 미국의 극동 방위선으로 국제 전쟁이 발발할 경우,


미군 육군이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범위를 한정한 경계선의 일종입니다.


하지만 애치슨 라인의 밖이라 해서 미군이 신경을 전혀 쓰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고,


미군의 공군력으로 커버가 가능하거나 가급적 지켜야 하는 지역으로 간주되고 있었습니다.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을 제외한 미국의 속내는, 


한국이 내전으로 붕괴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으며 전략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공산권의 미끼로 사용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며 미국제 무기를 지원할 경우, 


남한이 북한을 선제 공격하거나 더 나아가 북한, 중국, 소련과의 마찰이 발생하여 


제 3차 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남한의 무기 지원 요청에도 회의적으로 대응합니다.



결국 애치슨 라인에서의 한국 방위 지역 제외는 북한이 남침을 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됩니다.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에치슨 라인을 명분으로 남침을 승인받았으며 지원을 이끌어냅니다.


김일성은 애치슨 라인 이전부터 남침을 준비하고 계획했지만,


애치슨 라인은 김일성의 남침을 가속화 시켰으며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 전쟁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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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단 무기들이 활약한 걸프전은 현대전의 전형적인 사례입니다.



1990년 8월 2일 이라크는 기습적으로 쿠웨이트를 침공합니다.


쿠웨이트는 제대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으며 이라크의 침공 또한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쿠웨이트군은 도망가거나 각개격파 당했으며 쿠웨이트의 수도가 함락됩니다.


▶걸프전 첨단 무기 확인하기



걸프전의 원인



출처 : wikipedia



검은 황금의 전쟁이라고도 불린 걸프전은 석유를 둘러싼 각국의 이해 관계가 얽혀 있습니다.


1980년부터 1988년까지 이어진 이란-이라크 전쟁에서, 


이란의 공격으로 큰 경제적 손실을 입은 쿠웨이트는 채무를 갚고 경제적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석유를 초과 생산하고 있었으며 이는 석유 가격의 하락으로 이어지며 이라크에 손실을 입히고 있었습니다.


또한 오스만 제국 시절 쿠웨이트는 오스만 제국의 일부였고 이라크는 쿠웨이트가 이라크의 영토임을 주장합니다.


▶이란 화폐, 환율 확인하기



이란-이라크의 8년여간의 전쟁으로 이라크 경제는 붕괴 직전이었으며,


이라크는 아랍 국가들에게 약 300억 달러의 부채를 지고 있었습니다.


이라크의 최대 채권국은 쿠웨이트였으며 140억 달러의 부채가 있었습니다.


제다 회담에서 이라크는 쿠웨이트의 석유 초과 생산과 그로 인한 이라크의 손실을 언급하며,


부채 140억 달러의 채무 변제와 추가 100억 달러의 긴급 차관을 요청합니다.


쿠웨이트는 이를 거절했으며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침공합니다.





이라크에 대한 세계의 반응



출처 : wikipedia


쿠웨이트 유전에 출자한 미국과 유럽의 정유 회사들은 오일 머니를 둘러싸고 복잡한 상황에 빠지게 됩니다.


소련과 손을 잡은 이라크의 돌발 행동은 미국의 불안감을 증폭시켰으며,


군사적, 외교적 우호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소련마저도 이라크를 비난합니다.



중동의 적통 왕으로 인정받는 요르단의 후세인 국왕 역시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을 중재하려 했지만


이라크는 쿠웨이트의 불안정한 정권을 안정시키려는 목적이었다고 하며 사태를 악화시킵니다.


결국 UN 안전보장이사회는 다국적군을 결성하고 UN 안보리의 최후 통첩을 무시한 이라크를 야간 기습하며


1991년 1월 17일 전쟁이 시작됩니다.


▶요르단 화폐, 환율 확인하기



사막의 방패 작전, 사막의 폭풍 작전



출처 : wikipedia



사막의 방패 작전을 위해 10만명의 병력이 중동에 배치됩니다.


이라크의 사우디 아라비아 공격을 막는 방어적 의미로 항공전의 태세를 갖추며 작전을 수행하게 됩니다. 


방어진을 구축한 다국적군은 사막의 폭풍 작전을 수행합니다.


▶사우디 아라비아 화폐, 환율 확인하기



지휘 통제소, 방어 시설, 통신 시설 등으로 연결된 이라크의 주요 기지들은 다국적군의 1차 타겟이 됩니다.


1991년 1월 17일 새벽 아파치 헬기를 선두로 바그다드 공습을 시작합니다.


제공권을 빼앗긴 이라크군은 군사적으로 고립되었고 약 1,000여 시간의 공중 폭격은 사막의 폭풍처럼 몰아칩니다.



1991년 2월 24일 다국적군은 지상전을 전개합니다.


압도적인 전력 차이로 인해 이라크는 쿠웨이트 철수를 결정합니다.


1991년 2월 27일 쿠웨이트와 이라크를 잇는 80번 고속도로에서 수 만명의 이라크군은


철수하던 중 다국적군의 집중 포격을 당하여 전멸하게 됩니다.



1991년 2월 28일 다국적군의 로 걸프전을 막을 내리게 됩니다.



걸프전 이후



이라크는 전쟁에서 패한 후 미국의 경제 봉쇄를 당하게 되며 1,500억 달러의 전쟁 배상금을 물게 됩니다.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으로 시작된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담 후세인과 미국의 악연은 이어집니다.


2001년 9월 11일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의 911테러로, 


사담 후세인은 그 배후로 지목되어 2003년 이라크 전쟁이 시작되었으며 농가에 숨어있던 후세인은 체포되어 사형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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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프 전쟁은 페르시아만 지역에서 발발한 전쟁입니다.



걸프(Gulf)는 바다의 만(Bay)을 의미하는데, 


전쟁이 벌어진 지역은 걸프가 아니라 페르시아만 주변이라,


1차 이라크 전쟁, 페르시아만 전쟁, 쿠웨이트 전쟁, 1차 걸프 전쟁 등으로 불립니다.



걸프 전쟁의 발발



출처 : wikipedia



1990년 8월 2일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공으로 전쟁은 시작됩니다.


전쟁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쿠웨이트는 이라크의 기습 공격에 제대로 대응을 하지 못합니다.


이라크는 쿠웨이트의 공항과 활주로를 점령하고 사우디 아라비아와의 국경을 차단합니다.


쿠웨이트의 수도 쿠웨이트시티를 공격한 이라크는 시가지를 장악한 후,


1990년 8월 8일 이라크의 쿠웨이트 합병을 선포하고 이라크의 19번째 주인 쿠웨이트 주로 삼게 됩니다.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이라크를 침략자로 규정하고 무력 제제안을 결의합니다.


UN 안보리는 1991년 1월 15일까지 이라크 군의 무조건적인 철수를 요구하며 최후 통첩을 보냅니다.


그리고 UN 안보리 제제안에 따라 34개국의 다국적군을 결성합니다.


UN 안보리의 최후 통첩을 무시한 이라크는 쿠웨이트를 철수할 생각이 없었으며,


1991년 1월 17일 다국적군의 야간 기습 공격으로 전쟁이 시작됩니다.





현대전의 대표적인 사례 걸프전



출처 : wikipedia



나폴레옹 시대의 전쟁을 제 1세대 전쟁이라 하고, 보병과 기병 중심의 선과 선의 싸움이 진행됩니다.


산업 혁명 이후 철도와 공장, 대량 생산 기술의 발달을 발판으로 발발된 제1차 세계 대전제 2세대 전쟁으로 불립니다.


전차와 전투기 등의 기동전, 전격전 양상을 보인 제2차 세계 대전제 3세대 전쟁으로 불립니다.


전격전을 재해석하여 다양한 신무기를 선보인 걸프전은 제 4세대 전쟁으로 불립니다.


▶제1차 세계대전 확인하기

▶제2차 세계대전 확인하기



다양한 하이테크 병기들이 등장하며 현대전의 공포를 전세계 사람들에게 각인시키게 됩니다.


대표적으로 아파치 헬기, 패트리어트 미사일, 스텔스 전투기, 토마호크 순항미사일이 있습니다.



아파치 헬기는 저공의 고속 비행이 가능했고 지상군과 탱크 공격이 가능한 전천후 헬기였습니다.


고도 15m를 기점으로 날아가 이라크군 레이더 기지를 완벽히 파괴했습니다.


일명 밤의 지배자라고 불렸으며 어둠속에서도 사물 식별이 가능해 야간 작전에 집중적으로 투입되었습니다.


적외선 탐지기와 열 영상 탐지기가 탑재되었으며 3km 밖의 사물도 식별이 가능했습니다.


레이저 유도 헬파이어 미사일과 30mm 체인건으로 무장했습니다.



패트리어트 미사일은 미사일 잡는 미사일로 유명했습니다.


이라크군의 스커트 미사일은 패트리어트 미사일에 의해 공중에서 요격당합니다.



스텔스 Stealth는 은밀한 방법이라는 뜻으로 적의 모든 탐지 기능에 대항하는 은폐 기술을 갖춘 최첨단 전투기입니다.


공대공 미사일이나 고정 기관포는 장착되지 않았지만 한 두발의 미사일을 실은 스텔스기는


이라크 주요 전략 목표물의 40% 이상을 파괴할 정도로 엄청난 위력을 자랑했습니다.


또한 적의 레이더망을 무력화 시키는 스트라이크 패키지 없이도 단독으로 작전 수행이 가능했습니다.


레이더 전파를 교란시키기 위해 반사 면적을 극도로 줄인 기체 형상 역시 그 특별함을 더해주었습니다.



북아메리카 원주민의 근접 전투용 도끼인 토마호크의 이름을 딴 토마호크 순항미사일


수평 비행으로 목표물을 타격하며 그 정확도 역시 높았습니다.


지형 판독 소프트웨어를 사용하여 목표물을 찾아가게 됩니다. 



다양한 하이테크 병기들은 다국적군의 승리에 결정적 기여를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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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은 크게 세 개의 족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덴마크 지역을 중심으로 영국으로 진출했던 데인족,


스웨덴 지역을 중심으로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지방까지 진출한 스웨덴 바이킹,


노르웨이 지역을 중심으로 약탈 전사라고 불리던 노르웨이 바이킹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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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 시대, 파리 침공



출처 : wikipedia



8세기 말에서 11세기 중엽까지의 유럽은 바이킹 시대라 불릴만큼 바이킹의 세력이 확장되었습니다.


크고 작은 하천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 유럽은,


바이킹들의 특별한 설계로 제작되어진 바이킹배들이 자유로이 이동할 수 있었습니다.


바이킹의 배들은 센강을 가득 메우며 파리로 진격합니다.


845년부터 바이킹들은 본격적으로 파리를 침공하기 시작합니다.



835년 라그나 로스브로크는 데인족 바이킹 전사들을 이끌고 부활절에 파리를 침공합니다.


111명의 파리 군인을 포로로 잡은 바이킹은 전부를 교수형에 처하면서 공포를 유발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서프랑크의 왕 샤를 2세는 약 6톤의 금과 은으로 바이킹을 회유합니다.


하지만 이 회유책은 다른 바이킹족들의 연쇄 침략과 약탈을 야기시키게 됩니다.



885년 약 4만의 바이킹 전사들이 연합하여 파리를 침공하게 됩니다.


파리 시가의 중심지, 성탑과 2개의 다리로 요새화 한 시테섬에서, 


약 700척의 바이킹 배들이 내륙으로 진격이 불가능하자 바이킹 연합은 파리 포위전에 나서게 됩니다.


배에 탄 상태로 공선전을 치뤄야 했던 바이킹 전사들에게도 전투는 쉽지 않았습니다.


파리를 완전히 함락시키지는 못했지만 충분한 약탈은 성공한 바이킹은 주변의 마을과 성들을 다시 약탈하기 시작합니다.



1년여에 이른 포위전으로 파리의 시민들은 기아와 전염병으로 고통받게 되고, 


비만왕 샤를 3세는 바이킹과 협상을 시작합니다.


많은 은을 바이킹에게 지불하고 그 해 겨울철 약탈을 허용한다는 협상을 하게 됩니다.



롤로, 노르망디 공국 형성



노르만족 바이킹의 영웅 롤로는 10세기 초 노르망디 해안 지역을 침략합니다.


단순왕 샤를 3세는 롤로에게 노르망디 해안과 인근 지역을 내어주고 제후로 삼는 방법을 선택합니다.



노르망디 공국이 형성되게 됩니다.


샤를 3세의 요구는 롤로가 다른 바이킹의 침략을 방어하고 기독교로 개종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샤를 3세의 요구를 받아들인 롤로는 롤로에게 충성 서약을 맺습니다. 또한 샤를 3세의 딸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약탈과 상업을 생계 수단으로 하던 바이킹들에게 노르망디 공국의 제후가 되어 정착하며 안정된 삶을 살게된 롤로는,


큰 귀감과 동경의 대상이 되었고 이후 바이킹들은 전 세계로 진출하여 정착하게 됩니다.



잉글랜드 왕위 쟁탈전, 바이킹 워



출처 : wikipedia


1066년 잉글랜드의 참회왕 에드워드가 후사없이 사망하게 됩니다.


영국의 헤럴드 2세, 노르웨이의 하랄드 3세,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공작의 잉글랜드 왕위 찬탈전이 시작됩니다.


당시 유럽 전역으로 진출해 있던 바이킹들은 왕실과의 혼인으로 잉글랜드 왕위 계승에 복잡하게 연결이 되어 있었습니다.


또한 다양한 이해 관계로 인해 영국을 차지하는 사람이 유럽의 지휘권을 가져올 수도 있는 중요한 사안이었습니다.



첫번째 전투는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로 영국의 헤럴드 2세와 노르웨이의 하랄드 3세 사이에 벌어집니다.


약 270척의 배에 노르웨이 군대를 이끌고 온 하랄드 3세는 잉글랜드 북부에 상륙한 뒤 요크를 점령합니다.


요크셔의 스탬퍼드 다리에서 만난 두 군대는 좁은 다리에서 쟁탈전이 펼쳐지게 되고


잉글랜드 군대의 화살 세례에 하랄드 3세는 전사하게 됩니다.



두번째 전투는 헤럴드 2세와 윌리엄 공작의 헤이스팅스 전투입니다.


언덕위에 진을 친 잉글랜드군은 지속되는 소모전과 방어전에 지쳐 집중력이 흐트러지게 됩니다.


노르만 기사단을 공격하기 위해 언덕을 내려온 잉글랜드의 병사 일부로 인해 전열이 흐트러지게 됩니다.

 

이 틈을 놓치지 않은 윌리엄 공작은 잉글랜드군을 향해 돌진하고 윌리엄 공작의 승리로 전투가 마무리 됩니다.


이로써 노르만 왕조의 정복왕 윌리엄이 탄생하게 됩니다.





로빈 후드



로빈 후드의 배경이 바로 노르만 왕조의 정복왕 윌리엄 2세의 탄생입니다.


잉글랜드의 헤럴드 2세는 앵글로색슨 왕가의 마지막 왕이었으며,


노르만 왕조가 등장하면서 피지배층으로 전락한 앵글로색슨족의 노르만 족을 상대로 한 투쟁을 그린 작품입니다.



바이킹에 대한 평가와 바이킹 시대의 종식



약탈자의 이미지가 강하지만 무역과 상업을 발달시키며 오늘날의 유럽을 만들었다는 평을 듣습니다.


유럽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바이킹인이면서 모두 바이킹인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듯이,


바이킹의 영향은 유럽 사회를 변화시키기에 충분한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각 나라의 상업과 교역을 촉진시켰으며 전 세계의 문화 교류에도 크게 이바지합니다.


정복이 아닌 다른 나라의 문화에 동화되고 흡수하고 융화되며 문화의 다양성을 꽃피웁니다.



하지만 이러한 정착과 융화는 바이킹 시대를 종식시키는 결정적인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전사에서 상인으로 변모하며 정착 생활에 익숙해진 바이킹들은 


엄밀히 말하면 바이킹이 없어졌다기 보다 해적질을 하며 약탈을 일삼은 바이킹들이 사라졌다고 하는것이 맞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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