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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죽음은 로마 시민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믿었던 부하 브루투스에게 배신당하며 살해된 로마 최고의 권력자 카이사르,


역사의 배신자로 낙인찍힌 브루투스의 명분은 공화정 수호와 독재자 처단이었습니다.


로마 시민들 앞에서 연설을 시작한 브루투스는 자신의 행동의 정당성을 주장하지만,


로마 시민들의 반응은 차가웠으며 카이사르 암살파 일당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지 못합니다.


분노한 시민들을 피해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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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의 후계자



출처 : wikimedia



카이사르(시저)의 장례식이 끝난 후 로마 시민들의 관심은 누가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될 것인가 였습니다.


후보자는 두 명으로 압축되었고, 한 명은 카이사르의 평생의 동지이자 갈리아 전쟁을 함께 한 장군 안토니우스,


그리고 다른 후보자는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의 아들 카이사리온이었습니다.


당시 나이가 9세에 불과했던 카이사리온은 후계자로 임명될 수 없었기에, 


안토니우스는 자신이 후계자가 될 것임을 확신합니다.


당시 안토니우스는 38세로 로마의 집정관이었고 자타공인 카이사르의 오른팔이었습니다.



하지만, 카이사르 암살 6개월 전에 작성된 카이사르의 유언장이 공개 되었고


카이사르는 후계자로 옥타비아누스를 임명합니다.



카이사르(시저) 유언장



출처 : wikimedia



기원전 45년 9월, 이탈리아로 돌아오던 카이사르는 미리 유언장을 작성해 놓습니다.


자신의 조카 손자인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에게 재산과 이름을 상속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안토니우스와 브루투스를 유언의 공동 집행자로 지명합니다.


또한 카이사르 자신이 죽기 전에 옥타비아누스가 죽는다면 브루투스가 다음 상속자가 될 것이라고 적습니다.



타고난 군인이자 정치가였던 카이사르(시저)는 자신의 다음 세대에 필요한 리더는 탁월한 정치가라고 판단했습니다.


알렉산더 대왕, 한니발, 카이사르를 거치며 수많은 전쟁이 난무했던 시기가 어느 정도 정리가 되고


나라의 내정과 기틀을 바로 잡을 정치가가 나라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당시 18세였던 옥타비아누스, 그리고 카이사르 애인의 아들이었던 브루투스는 정치적 능력이 뛰어난 인물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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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시저) 유언장 내용



1. 카이사르 소유 재산의 3/4은 가이아스 옥타비우스와 아티아의 아들인 옥타비아누스에게 남긴다.


5. 제 1 상속인 옥타비아누스는 상속과 동시에 카이사르의 양자가 되고, 아들이 된 이후에는 카이사르라는 성을 이어받는다.


6. 수도에 사는 로마 시민들에게는 1인당 300세스테르티우스씩 주고, 


테레베 강 서안에 있는 카이사르 소유의 정원을 시민들에게 기증한다.



300세스테르티우스는 당시 로마 일반 시민 월급의 몇 개월 치에 해당하는 금액입니다.


카이사르의 유산에서 로마 시민에게 1인당 300세스테르티우스를 주고 나면 사실 유산은 거의 남지 않기 때문에,


유산은 큰 의미가 없었지만 로마 최고의 권위를 가진 카이사르라는 성을 이어 받는 것은 강력한 힘을 부여 받는 것입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의 유언장에 따라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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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아 전쟁과 로마 내전을 모두 승리한 카이사르는 


명실상부 로마의 1인자로 등극하게 됩니다.



폼페이우스가 죽고 카이사르(시저)는 폼페이우스의 잔여 세력을 정리하기 시작합니다.


중동 지역에서의 젤라 전투에서 승리를 이끌었고 아프리카의 루스피나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기원전 45년 히스파니아의 문다 전투에서 승리하며 마지막 저항군을 격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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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공화정, 원로원과 호민관



출처 : public domain



로마는 왕이나 황제가 없는 공화정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에 의한 독재를 막기 위한 방법이었습니다.


로마는 원로원이라는 체제를 통해 외교, 정치, 재정의 결정권을 수행하였으며 서로를 견제하는 수단이었습니다.



원로원은 귀족들의 집합체로, 10년여간의 로마군 복무 경험이 필수였습니다.


300명으로 구성된 원로원은 술라 시대를 거치면서 600명으로 늘어나게 됩니다.


수백명으로 구성된 원로원의 의견 취합을 위해, 원로원의 리더를 집정관으로 뽑고 임기를 1년으로 합니다.


독재를 막기 위해 집정관은 총 2명을 뽑았으며, 


두 명의 집정관 의견이 다를 경우를 대비해 임기 6개월의 집정관의 리더 독재관을 뽑게 됩니다.


로마에 긴박한 상황이 발생한다면, 독재관은 모든 결정을 단독으로 내릴 수 있는 권한을 갖게됩니다.



로마에는 귀족이 아닌 평민을 위한 관직인 호민관도 존재했습니다.


호민관은 오직 평민을 위한 관직으로 평민 계급에서만 선출될 수 있었고, 


원로원에서 정한 법률이나 정책이 평민들에게 불이익이 있다고 판단되면 무조건 반대할 수 있는 권리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평민 출신인 사람이 호민관이 되면 호민관을 거쳐 원로원의 구성원이 됩니다.



카이사르(시저) 암살의 원인



출처 : wikimedia



문다 전투 승리 이후 카이사르는 로마로 입성합니다.


갈리아 정복내전 승리로 인해 카이사르의 명성과 업적은 하늘을 찌를 듯 했으며


모든 로마 시민들의 열렬한 지지와 존경을 얻게 됩니다.



기원전 46년, 6개월 임기의 독재관 임기규정을 10년으로 바꾸며 독재관에 취임하게 되며 각종 개혁을 실시합니다.


기원전 44년, 카이사르는 원로원과 민회로부터 종신 독재관에 임명됩니다.


종신 독재관에 임명된 카이사르의 절대 권력은 오히려 독이 됩니다.



종신 독재관에 임명된 한달 후, 기원전 44년 3월 15일, 카이사르(시저)는 암살당하게 됩니다.


암살파에는 갈리아 원정을 함께 했던 군단장 포함, 카이사르의 부하들도 가담합니다.


카이사르 암살의 주축이었던 브루투스는 카이사르가 황제가 되려고 했기에 죽였다고 연설합니다.


카이사르(시저) 암살에 가담한 인원은 60명 혹은 그 이상이라고 하며 총 23번의 칼에 찔려 죽음을 맞이합니다.  


카이사르의 죽음은 공화정의 종말을 야기했으며, 로마 민중의 슬픔과 분노를 일으킵니다.


그리고 로마 제 1대 황제 옥타비아누스가 역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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