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1592년 일어난 임진왜란은 16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전투입니다.



약 20만명의 왜군은 부산을 시작으로 거침없이 북으로 진격해 단 20일만에 한양을 함락시킵니다.


선조는 의주까지 몽진을 떠나 명나라에 망명을 요청했을 정도로 상황이 급박했습니다.


속전속결의 기습으로 조선을 유린한 왜군은 보급로가 끊키면서 전황이 불리하게 됩니다.


명나라의 원군 파견과 조선 의병과 지방군의 활약이 더해지며 왜구는 후퇴하게 됩니다.


그 중심에는 이순신 장군이 있었습니다.


▶ 임진왜란 지상전과 선조 몽진 확인하기





옥포 해전



출처 : wikipedia



옥포 해전은 조선 수군에게 첫 승리를 안긴 이순신 장군의 첫 해전입니다.


옥포는 현재의 경상남도 거제시에 속하는 옥포만 일대를 일컫습니다.


당시 전라좌수사였던 이순신 장군은 경상우수영에 속했던 옥포 해역의 물길과 조류에 맞는 전술 훈련이 부족했기에


출정을 거부하지만 전라도와 충청도로 연결되는 옥포의 중요성을 깨달은 원균의 요청으로 출정하게 됩니다.


이순신 장군은 철저한 전술 아래 전라좌수영 함대를 이끌고 옥포로 향하며 맹렬한 공격으로 일본 수군을 침몰시킵니다.



한산도 대첩



출처 : wikipedia



한산도 대첩은 살라미스 해전과 함께 세계 4대 해전으로 꼽히며 임진왜란의 판도를 바꾼 결정적인 전투입니다.


한산도 대첩은 학익진법을 사용한 전투로도 유명합니다.


학익진법은 학이 날개를 펼친 듯한 진법으로 적의 함대가 좁은 곳에서 넓은 곳으로 나올때 포위하여 공격하는 진법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지형과 지물, 물길, 조류까지 완벽히 파악하여 유리한 전투를 진행합니다.


좁은 견내량 해협을 빠져나온 일본군은 한산도 앞바다에서 유인 작전에 걸려 격침당합니다.


또한 이순신 장군은 포격으로 적함을 궤멸시키고 적함의 갑판에서 백병전을 벌여 일본군을 격퇴시킵니다.


▶ 살라미스 해전 확인하기



정유재란



출처 : wikipedia



1597년 8월 임진왜란의 정전 회담이 결렬되고, 왜군은 다시 조선을 침공합니다.

일본 수군은 보급로 확보를 위한 해상권 장악이 가장 큰 목표였습니다.



탁상공론이 벌어지던 당시의 조선은, 조선 해군이 일본 해군보다 강하니 부산 앞바다에서 왜군을 격퇴하라고 명령하지만


철저한 준비와 치밀한 계획 그리고 자신이 유리한 조건에서 전투를 벌이는 이순신 장군은 이를 거부합니다.


부산 앞바다에서는 조선의 판옥선이 그 능력을 발휘하기 어려웠으며, 


부하들의 희생을 막기 위해 이순신 장군은 무모한 출정 명령에 따르지 않고 버팁니다.


조정과 선조는 이러한 이순신을 불신하기 시작하며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칠천량 해전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이 없는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의 수군은 왜군에게 패하게 됩니다.


조선은 169척의 함선은 물론 최정예 해군까지 모두 칠천량 해전으로 잃게됩니다.


임진왜란 전투 중 최악의 전투로 꼽히는 칠천량 해전의 패배 후, 조선은 단 12척의 배와 수군 120명만이 남아있었습니다.



명량 대첩



출처 : wikipedia



명량 대첩은 정유재란의 판도를 바꾼 기적의 전투입니다.


칠천량 해전의 대패로 거의 모든 해군을 상실한 조선은 이순신 장군을 복권하고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합니다.


물살이 센 울돌목의 지형과 조류를 활용한 이순신 장군의 전술은 완벽히 적중하게 됩니다.



단 12척의 배 바다를 가득 메운 일본군의 수군을 격퇴하고 수륙병진으로 한양을 점령하려던 일본군을 저지합니다.


명량 대첩은 정유재란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인 전투입니다.


명량 대첩에서 이순신 장군은 전사하게 됩니다.



임진왜란 이후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군은 철수하게 되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은 막을 내리게 됩니다.


조선은 임진왜란 후 상업이 발달하고 신분제가 동요되는 등의 사회적 변화가 일어나게 됩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의 조선을 조선 후기라 부르며 조선 후기의 모든 변화는 임진왜란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중국의 명나라는 국력이 쇠퇴해지고 만주족에 의해 멸망합니다. 만주족은 청나라를 건설합니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이 몰락하고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 막부를 수립합니다.



반응형
반응형


1592년 음력 4월 13일 일본군 선발대가 부산을 공격합니다.



약 1만 8,000여명의 일본군은 순식간에 부산을 함락시킨 후 한양으로 향합니다.


일본군의 행군 속도는 1일 평균 약 20km로 진격의 속도가 매우 빨랐습니다.


조선의 전략, 전술을 이미 파악하고 있던 일본군은,


조선군의 방어진이 갖추어지기 전에 속전속결로 기습하여 한양으로 진격하여 왕을 잡는 것이 목표였습니다.



지상전과 선조 몽진



출처 : wikipedia




 1952년 음력 4월 13일

 부산 진성 함락

 1952년 음력 4월 15일

동래성 함락 / 선조, 신립 장군을 삼도 순변사로 임명

 1952년 음력 4월 18일

 고니시 군대 양산 입성

 1952년 음력 4월 19일

 일본군 김해 죽도 상륙

 1952년 음력 4월 24일

 상주 함락과 경상도 일본군에 의해 점령

 1952년 음력 4월 28일

 충주 탄금대에서 일본군에게 대패 / 신립 전사

 1952년 음력 4월 30일

 선조 몽진

 1952년 음력 5월 2일

 일본군 한양 점령

 1952년 음력 5월 17일

 일본군 임진강 전투 승리 / 일본군 한반도 북부로 진격

 1952년 음력 6월 13일

 평양 함락

 1952년 음력 6월 22일

 의주 행재소에서 명나라 망명 계획

 1952년 음력 6월 27일

 명나라의 망명 허가 / 대신들의 반대로 무산

 1952년 음력 6월 30일

 명나라 군대 조선 파병

 1953년 음력 1월 27일

 조선군과 명군의 평양성 수복

 1953년 음력 2월 12일

 권율 장군 행주 대첩 승리

 1953년 음력 8월

 명나라가 일본에 휴전 협상 제안 - 이후 3년에 걸친 휴전과 협상 과정 진행

 1953년 음력 10월 3일

 선조 한양 도착

 1953년 음력 10월 6일 - 10일

 진주 대첩 승리





조선군의 반격



출처 : wikipedia



임진왜란 개전 2달 후 상황이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각지의 지방군과 의병들이 곳곳에 집결하기 시작했으며 일본군에 지속적인 피해를 입히기 시작합니다.


또한 평양에서 왕세자로 책봉된 광해군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의병 봉기를 촉구했습니다.


전보다 일찍 찾아온 겨울로 날씨는 점점 추워지고 있었으며 일본 본토에서 오던 보급선은 이순신 장군에 의해 차단됩니다.


일본군의 전황은 날로 불리해지고 있었으며 조선군은 일본군의 전략을 파악 대응체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 임진왜란 군사제도 확인하기



명나라 참전



출처 : 위키백과



당시 만주의 만주족과 갈등이 있던 명나라는 조선이 일본군에 의해 점령되었을 때.


일본군과 만주족이 협력하여 명을 공격할 것을 막기위해 임진왜란에 참전하게 됩니다.


일본군이 압록강을 넘기전에 조선 땅에서 일본군을 저지하기 위해 1592년 6월 5천의 군사를 1차로 파병합니다.


그리고 이여송의 5만 대군을 2차로 조선에 파병합니다.



일본군을 만만히 봤던 명나라의 군대는 여러 전투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으며,


결국 왜구 전문 부대인 계광의 절강성 부대를 조선에 파병하게 됩니다.


가지를 치지 않은 대나무를 손잡이로 사용하는 병기인 낭선과 삼지창을 사용한 척계광은 원앙진을 사용했으며,


원앙진은 병사 12명이 한 몸이 되어 백병전에 능한 왜구와 싸우는 진법이었습니다.  



1593년 1월 3일간의 조명연합군의 총공세로 고니시 부대는 항복을 선언하고 평양성에서 철수하게 됩니다.

 

평양성을 수복하고 이후 행주대첩과 진주대첩에서 왜군에 대승을 거두며 왜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하게 됩니다.



반응형
반응형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야욕은 조선으로 향합니다.



일본은 1592년 4월 14일 약 700척의 배를 이끌고 부산을 침략합니다.


명나라로 가는 길을 내어달라는 정명가도를 앞세워 약 20만명의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합니다.


무서운 기세로 북진한 일본군은 약 20일만에 한양을 점령하기에 이릅니다.



동북아의 정세



출처 : wikipedia



당시 중국은 명나라로 13대 신종 황제 시대 중반부터 쇠퇴기에 접어들게 됩니다.



일본은 전국 시대의 내전 속에 사회적 변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전국 시대를 통일하게 되고 이는 부의 증가와 국력 성장을 일으킵니다.,


통일된 일본 각지로 특산품과 자원이 유통되면서 부가 증가하게 됩니다.


100년간 이어진 내전으로 대규모 전투에 유용한 진법이 발달했고, 


전술 연마와 신무기 수입, 개발 등 군사력이 성장하게 됩니다.



조선은 당파 싸움으로 인해 조정이 혼란스럽고 민심이 어지러웠습니다.


1590년 일본의 상황을 파악하고자 서인인 정사 황윤길과 동인인 부사 김성일을 통신사로 일본에 파견합니다.


하지만 전쟁 수행 능력 유무와 전쟁 지지 여론 등의 일본의 구조 파악에 실패하게 됩니다.



1951년 히데요시는 통신사 편에 침략의 의도가 분명한 정명가도의 문자를 조선에 답서로 보내지만


서인인 황윤길은 침략이 있을 것임을, 동인인 김성일은 침략이 없을 것임을 주장하며 의견이 갈리게 됩니다. 


조선은 상반된 주장과 상관없이 전쟁을 준비하지만 200여년간 지속된 평화로 인한 병농 일치 예비군 체제는


100년간 이어진 내전으로 인해 실전으로 단련된 일본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조선의 군사 제도 부병제와 일본의 군사 제도



출처 : wikimedia



당시 조선의 군사 제도는 부병제로 평시에는 농민, 전시에는 군인이 되는 시스템이었습니다.


이들의 훈련은 제식 훈련만 실시한 정도였으며 보병, 기병, 포병 등의 편제 비율이 맞지 않은 상태였습니다.


또한 재정이 열악하여 사실상 편제 훈련의 의미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가난한 백성은 군역을 나간 병사의 농지에서 일을 하거나 군비를 지원하는 봉족으로 배속됩니다.


돈 있는 양인들은 군역을 대신해 돈을 지불합니다.


돈 있는 사람에게는 군역을 지게 하고 돈 없는 사람에게는 일을 하게 하는 제도적인 문제점이 큰 시스템이었습니다.



일본은 군인과 농민이 따로 존재하였습니다. 


그야말로 전문 군인의 시대였으며 16세기 전세계의 대부분의 국가는 전문 군인을 양성하던 시기였습니다.


군인은 전쟁을 위한 훈련에만 열중할 수 있었고 농민은 전쟁 물자를 지원함으로써 효율적인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농병일치제인 조선은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으며 백성의 고충 또한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