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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38도선 전역에 걸쳐 남침을 시작합니다.



지상군의 남침과 동시에 북한군은 바다로도 침투를 시작합니다.


북한은 지상군을 지원하기 위해 강원도 동해안의 삼척과 옥계에 특수 부대를 상륙시킵니다.


또한 무장 수송선에 게릴라 600명을 태워 부산으로 보냅니다.


부산을 점령하고 후방 부대의 지원과 보급을 끊고 유엔군의 부산 상륙을 저지하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


▶ 6.25전쟁의 시작

▶ 한강 대교 폭파와 춘천-홍천 전투 확인하기





대한해협 해전 / 백두산함 전투



북한군이 동해안에 상륙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우리 국군은, 진해에서 훈련중이던 백두산함을 묵호로 출항시킵니다.


괴선박을 발견한 백두산함은 게릴라 600명을 태운 무장 수송선임을 확인하고 해군 본부에 보고합니다.


해군 본부는 격침 명령을 내립니다.


당시 백두산함의 승조원들은 실전 경험이 부족했으며 실탄 사격 경험은 단 5회 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한 시간 가량 교전이 지속되던 중, 3인치 포탄이 적함의 마스트와 기관실에 명중됩니다.


북한의 무장 수송선은 격침되고 백두산함의 승리로 게릴라 부대의 부산 상륙을 저지합니다.



김일성은 한 달 안에 남한을 점령할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주요 전략 중 하나인 부산 침투를 계획했습니다.


북한의 지상군은 빠른 속도로 서울로 진격하고 있었으며, 서울과 부산을 함락시킨다면 전쟁은 끝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부산은 대한민국의 관문이자 항구 도시로 부산이 함락된다면 유엔군의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길이 막혀버리는 상황이었습니다.


기습 게릴라를 투입한 북한군의 전술은 백두산함의 활약으로 막혀버리게 됩니다.



백두산함의 승리가 아니었다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 되었을 것입니다.


미국의 역사학자 노만 존슨은 "백두산함의 승리는 6.25전쟁의 승패를 가르는 분수령" 이라고 했습니다.



백두산함



출처 : wikimedia



백두산함은 대한민국 최초의 전투함이자 당시 해군이 보유한 유일한 전투함이었습니다.


해군은 있지만 전투함이 없었던 당시, 1949년 6월 함정건조기금거출위원회가 결성됩니다.


전투함을 사기 위해 돈을 걷자는 의견이 모아지며 해군 장교들은 월급의 5%~10%를 모금합니다.


수병들은 자발적으로 폐품을 모아 기금을 마련했으며 국민들의 성금도 이어집니다. 


4개월 만에 1만 5천 달러의 기금이 모아지고 정부 지원금 4만 5천 달러를 합해 총 6만 달러 정도의 돈이 모입니다.



전투함을 구입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여서,


미국 해양 대학교의 퇴역 초계정 화이트헤드 소위호를 인수합니다. 


엔진만 사용 가능했고 다른 부분들은 해군 장교들이 손수 수리를 해서 우리나라로 가져오게 됩니다.


미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하와이와 괌에서 3인치 함포와 실탄 100발을 구비합니다.



6.25 전쟁이 일어나기 2달전인 1950년 4월 10일 진해항에 입항합니다.


세계 유일 무이하게 장교들과 수병들, 국민들이 힘을 모아 전투함을 마련한 자랑스러운 역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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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의 선제 공격을 핑계로 허위 선전 하며 북한군은 남침합니다.



소련에서 지원 받은 최신형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은 1950년 6월 25일 개성 방어선을 격파하고,


오전에 동두천과 포천을 함락, 26일 의정부, 27일 서울 도봉구의 창동 방어선을 함락시킵니다.


6월 28일 새벽, 서울 시내가 북한군에 의해 점령당하게 됩니다.


▶6.25 전쟁의 시작 확인하기





한강 대교 폭파, 북한군의 서울 점령



출처 : goodfreephotos



6월 28일 0시, 북한군은 이미 서울 인근의 미아리까지 들어왔고 서울 시민들은 피난길에 오릅니다.


전황에 밀리던 대한민국 국군 역시 한강 이남에 방어선을 구축하기 위해 후퇴를 시작합니다.



6월 28일 새벽 2시, 대한민국 국군은 후퇴로인 한강 철교와 한강 대교를 스스로 폭파합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서울을 떠난 상태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육성이 녹음된 방송이 27일 밤 10시에 나갔고, 


서울 시민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서울에 남아 직접 방송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서울을 지키라는 방송을 듣고 이를 믿어 피난을 떠나지 않은 서울 시민들은


한강의 다리들이 폭파되어 피난을 떠날 수 없었으며 북한군에 의해 서울이 점령되는 것을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로 인해 10만이 넘는 시민들이 피살되거나 북으로 납치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무고한 시민들을 거짓말로 속이고 혼자서 도망친 이승만에 대한 언행은 참으로 깊은 탄식을 불러 일으킵니다.



한강 대교의 폭파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과 논쟁이 끊이지 않습니다.


일각에서는 한강 대교의 폭파로 인해 파죽지세였던 북한군의 진격을 늦추고 우리 국군의 전열을 정하며,


유엔군이 한국 전쟁에 개입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줬다고 평가합니다.     



다른 한편에서는 무고한 시민들을 사지로 내몰았으며,


국군의 전열 정비가 아닌 이미 와해된 우리 군의 사기를 꺾고 한강 북단에 고립된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았다고 합니다.


이승만은 27일 대전으로 피신, 대구, 익산, 목포를 거쳐 7월 2일 부산항에 도착합니다.



한강 대교를 폭파한 우리 국군은 6월 28일부터 7월 3일까지 6일 동안 북한군을 저지합니다.



춘천-홍천 전투



출처 : flickr



북한군의 진격은 그들의 예상처럼 순조롭게 진행이 되지 못합니다.


서울을 함락한 북한군을 한강 대교와 철교를 폭파하며 저지시킨 한강 대교 폭파 사건도 있었지만,


동부 전선의 춘천-홍천 전투에서의 우리 국군의 활약과 대승이 결정적인 역할을 합니다.


북한군의 진격을 무려 3일이나 저지했으며 북한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



전쟁이 길어질 경우 미군의 개입으로 인해 승리를 장담할 수 없던 김일성은, 


단기간 내에 남한을 정복한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춘천지역에서 막히며 실패하게 됩니다.


강원도 춘천, 홍전, 인제에서 고전하던 북한군은 계획에 큰 차질에 생기게 됩니다.


춘천-홍천 전투에서의 북한군 3일 지연은 북한군에게 마우 큰 악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게다가 한강을 도하하지 못하면서 시간이 지체되고, 그 사이 유엔군의 파병이 가능해집니다. 


또한 남한의 국군을 섬멸하지 못하고 남쪽으로 밀어내게 되면서 국군이 전열을 가다듬고 정비할 시간을 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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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은 한국 전쟁으로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기습 남침으로 시작됩니다.



제 2차 세계 대전 종결과 함께 미국과 소련의 냉전 구도가 폭발한 사례 중 하나입니다.


1953년 7월 27일 정전 협정이 체결되기까지 약 3년 동안 이어졌습니다.


전쟁의 종전이 아닌 정전이며 아직까지도 휴전 상태인 세계사에 유래없이 긴 휴전입니다.


남한에는 미국영국, 캐나다, 호주, 터키, 태국, 콜롬비아 등의 유엔 16개국에서 전투군을 파견했으며,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인도, 이탈리아, 서독의 6개 나라에서 의료지원군을 파견합니다.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공산군 지원과 동독, 체코 등의 5개국의 의료 지원군을 지원받습니다.


▶ 제 2차 세계 대전 알아보기                                  ▶ 터키 환율, 화폐 알아보기

▶ 미국 달러 환율, 화폐 알아보기                             태국 환율, 화폐 알아보기

▶ 영국 파운드 환율, 화폐 알아보기                          콜롬비아 환율, 화폐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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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시작, 6.25 전쟁



출처 : wikimedia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포성이 평화로운 새벽을 뒤흔듭니다.


전쟁의 주 원인은 김일성의 남침 야욕으로, 북한군은 38도선 전역에 걸쳐 일제히 남침을 개시합니다.


1949년 6월 말, 주한 미군은 남한에서의 철수를 완료하게 되고,


1950년 6월 25일 이전까지 1,000여 회 이상의 수 많은 국지전이 38도 경계선에서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미군이 철수한 남한의 상황을 지켜보며 탐색, 도발하던 북한군은 선전포고 없는 기습을 실행합니다.


당시 남한과 북한의 병력차이는 약 2배 정도로 북한의 병력이 남한보다 앞서고 있었습니다.


또한 전쟁 장비 역시 북한이 압도적이었으며 당시 남한에는 전차가 한 대도 있지 않았습니다.


남한군은 장비 및 무기, 보급의 부족으로 질적, 양적으로 매우 열세에 놓여 있었습니다.



애치슨 라인



출처 : wikipedia



1950년 1월 미국은 애치슨 라인 Acheson Declaration에서 한국을 방위 지역에서 제외합니다.


애치슨 라인은 미국의 극동 방위선으로 국제 전쟁이 발발할 경우,


미군 육군이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범위를 한정한 경계선의 일종입니다.


하지만 애치슨 라인의 밖이라 해서 미군이 신경을 전혀 쓰지 않는다는 의미는 아니고,


미군의 공군력으로 커버가 가능하거나 가급적 지켜야 하는 지역으로 간주되고 있었습니다.



애치슨 라인에서 한국을 제외한 미국의 속내는, 


한국이 내전으로 붕괴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으며 전략적 가치가 없다고 판단하여


공산권의 미끼로 사용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고 합니다.


또한 남한에 미군이 주둔하며 미국제 무기를 지원할 경우, 


남한이 북한을 선제 공격하거나 더 나아가 북한, 중국, 소련과의 마찰이 발생하여 


제 3차 대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판단하여 남한의 무기 지원 요청에도 회의적으로 대응합니다.



결국 애치슨 라인에서의 한국 방위 지역 제외는 북한이 남침을 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됩니다.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에치슨 라인을 명분으로 남침을 승인받았으며 지원을 이끌어냅니다.


김일성은 애치슨 라인 이전부터 남침을 준비하고 계획했지만,


애치슨 라인은 김일성의 남침을 가속화 시켰으며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 전쟁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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