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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상륙작전의 성공과 서울 탈환은 6.25 전쟁의 판도를 뒤바꿉니다.



인천이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북한군은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하게 되고,


낙동강 방어선을 치열하게 지키고 있던 우리 국군과 유엔군은 반격에 성공하며 추격을 합니다.


보급로가 끊키고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진 북한군은 무기도 버리고 도망칠 정도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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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군의 반격, 북진 개시



출처 : wikipedia



1950년 10월 1일 육군 제 3사단은 38선을 돌파하여 북진을 개시합니다.


낙동강 방어선 전투 당시 포항 일대를 지키고 있었던 육군 제 3사단은 동해안을 따라,


강원도 양양 38선까지 진격하여 최초로 38선을 돌파한 부대가 됩니다.


이 날을 기념하고 북진 통일의 진취적 기상을 잊지 말자는 의미로 10월 1일 국군의 날이 제정됩니다.



평양 탈환과 북진, 중공군의 개입



출처 : wikimedia



1950년 10월 19일 국군 제1사단은 평양에 최초로 입성하게 됩니다.


유엔군과 함께 국군은 패주하는 북한군 잔당을 소탕하는 시가전에 돌입하게 됩니다.


10월 30일 평양 입성 환영식이 열리게 되고 태극기로 평양 시내는 뒤덮이게 됩니다.



평양 탈환에 성공한 국군과 유엔군은 순식간에 압록강까지 밀고 올라가며 통일 직전까지 밀어 붙이게 됩니다.


하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인해전술에 밀린 국군과 유엔군은 평양을 다시 내어주며 후퇴를 하게 됩니다.



김일성 피신



김일성은 대유동, 창성, 만포, 강계 등을 거쳐 고산진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중국 국경 지대인 고산진은 압록강 근처의 북한 자강도에 속하는 최장의 은신처였습니다.


유엔군이 이곳을 공중 폭격하려면 중국 영공을 침범할 수 밖에 없는 위치였습니다.

 


제한 전쟁과 휴전



출처 : good free photos



 1951년 6월 23일

 소련의 유엔 대사의 한국 전쟁 정전 제의

 1951년 7월 8일

 정전 예비 회담이 개성에서 개최 

 1951년 10월 25일 회담 판문점 개최
 1951년 11월 28일 당시 전선을 임시 휴전선으로 채택
 1953년 4월 6일 휴전 회담 재개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 조인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휴전 협정이 조인됨으로 3년 1개월 만에 한국 전쟁은 휴전으로 매듭이 지어집니다.



1951년 11월 28일 당시의 전선이 휴전선으로 채택되면서 제한 전쟁은 잠시 소강 상태에 들어갔지만,


이내 고정된 전선에서의 근거리 전투와 고지 쟁탈전은 더욱 치열해집니다.



휴전이 되면 각기 점령 지역에서 국경이 정해지는 조건으로 싸우는 전쟁을 제한 전쟁이라고 하며,


단 한 치의 땅도 더 차지하기 위해, 양보할 수 없기에 물러섬 없는 소모전이 지속됩니다.


1952년 8월에 벌어진 수도고지에서는 6일만에 7번 고지의 주인이 바뀌었으며,


백마고지는 1개월 사이에 25번, 수도고지와 백마고지 사이의 저격 능선은 4일간 17번의 주인이 바뀌게 됩니다.



휴전 협정은 현재까지 효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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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지상군에 밀려 부산을 제외한 모든 지역이 북한군에 의해 점령됩니다.



최후의 방어선 낙동강 방어선을 지키기 위한 치열한 전투가 펼쳐지고,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 이래 최대의 전공을 세운 진동리 전투


전쟁의 사활이 걸린 영천 전투 등에서 승리한 우리 국군은 반격을 개시합니다.


▶ 진동리, 영천 전투 확인하기

▶ 6.25 전쟁의 시작 알아보기





인천상륙작전 계획



출처 : wikipedia



낙동강 전선에서 우리 군의 반격이 시작되자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합니다.


1950년 6월 28일 북한군에 의해 서울이 점령되고, 1950년 6월 29일 참모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직접 전선을 시찰하며 현장에서 답을 찾았던 맥아더 장군은 서울을 방문합니다. 



당시 일본에 있던 맥아더 장군은 수원 비행장을 통해 서울로 이동을 하였는데,


수원 비행장에 도착했을 당시 북한군의 공격으로 인해 화염에 휩싸여 있었습니다.


인천을 통한 측면 공격으로 서울을 탈환하고 북한군의 보급선을 차단해 병력을 분리한다는 계획을 세웁니다.


1950년 7월 초 인천상륙작전의 초안이 수립됩니다.



인천상륙작전 반대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은 무모한 상륙작전이라는 이유로 트루먼 대통령을 포함,


합동참모본부, 미 의회, 해병대의 반대에 부딪치게 됩니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조수간만의 차가 큰 인천 앞다바는 상륙작전을 펼치기에 부적합했습니다.



상륙작전 후보지 중 하나였던 군산에서 작전을 수행하자는 참모들에게, 


맥아더 장군은 군산은 전략적 가치가 없다고 하며 인천으로의 상륙작전을 주장합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확률은 1/5,000로 그 성공 가능성이 희박했습니다.


인천은 상륙작전에 불합리한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북한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서울을 탈환함으로써 북한군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동시에 낙동강 전선의 연합군과 한국군과의 포위전을 진행함으로써 북한군을 섬멸할 수 있다고 설득한 맥아더 장군은


9월 13일 인천상륙작전을 개시합니다.


인천상륙작전 시도



출처 : wikipedia



1950년 7월 1차의 상륙작전이 시도됩니다.


미 육군 1개 사단과 해병대 1개 연대로 상륙작전을 준비했지만,


생각보다 빠르게 남진하던 북한군에 맞서기 위해 상륙작전에 투입하려던 미 제1기병사단을 포항으로 투입하게 됩니다.


이로 인해 1차 상륙작전인 블루하트 작전은 실패하게 됩니다.



미국 본토에 병력 증원을 요청한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재개하고 인디언헤드부대인 미 제2보병사단이 투입됩니다.


하지만 낙동강 전선이 불리하게 되면서 증원된 병력마저 낙동강 전선으로 투입이 됩니다.


2차 시도 역시 실패하게 됩니다.



1950년 9월 15일 3차 상륙작전인 작전명 크로마이트가 시도됩니다.


1개 해병 사단을 지원 받은 맥아더 장군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미 극동군사령부 제7사단을 동원하기로 결정합니다.


또한 대한민국 청년들을 병력으로 보충해 달라고 주한미군대사에게 요청합니다.


8,600명의 한국 청년들이 모집되었고 미 극동군사령부 신병교육대에서 기초 훈련을 받은 후 미 7사단에 편입됩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카투사 부대의 기원입니다.



인천상륙작전, 크로마이트



출처 : wikipedia



맥아더 장군의 명령으로 9월 13일 인천상륙작전이 개시됩니다.


미국 226척, 한국 15척, 영국 12척 등 총 261척의 군함이 동원됩니다.


이틀간의 맹렬한 함포 사격 후, 9월 15일 유엔군과 우리 국군 해병대가 인천을 상륙한 후 서울로 진격합니다.



북한군은 약 2만의 병력으로 저항을 시도했지만 9월 20일 유엔군과 국군은 한강을 건너 서울에 침투합니다.


북한군이 대부분이 섬멸되고 서울에서 퇴각하며 9월 28일 서울을 다시 탈환하는데 성공합니다.


서울 탈환에 성공한 후 10월 1일, 육군 제 3사단은 38선을 넘어 북진을 개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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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8월 15일 이전까지 부산을 점령하는 것이 북한군의 목표였습니다.



6월 25일 38도선에서 총 공세를 퍼부으며 남으로 진격한 북한군은,


뜻하지 않은 우리 국군의 격렬한 저항에 부딪치며 계획에 차질이 생기기 시작합니다.


모든 것이 열세였지만 우리 국군은 끈질지게 저항하며 북한군을 저지합니다.


총 연장 240km의 낙동강 방어선 구축 후 총 반격을 시작합니다.


▶ 6.25 전쟁의 시작 알아보기

▶ 6.25 전쟁 최초의 승리, 백두산함 알아보기





진동리 전투



출처 : flickr



1950년 8월 3일 경상남도 진동리에서 북괴군 제 6사단의 침공을 저지하며,


대한민국 해병대 창설 이래 최대 전공을 세운 전투입니다.


진동리 전투의 승리는 낙동강 방어선 구축에 크게 기여하며 전 장병 1계급 특진의 영예를 얻습니다.



1950년 7월 말에서 8월 초 사이, 남한은 부산을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지역을 북한군에 점령당하게 됩니다.


북한군은 부산으로 진격하기 위한 5개의 루트를 선정하고 부산으로 진격합니다.


포항에서 울산을 거쳐 부산으로 가는 루트, 경주에서 부산으로 가는 루트, 대구에서 부산으로 가는 루트,


삼랑진에서 부산으로 가는 루트, 마산에서 부산으로 가는 루트 총 5개의 루트가 있었습니다.


5가지의 루트중 4개의 루트는 파악을 하고 있었지만 마산에서 부산으로 들어오는 루트는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마산에서 진격하던 북한군은 북괴군 6사단으로 그 실체는 팔로군 산하의 조선인 부대였습니다.


팔로군은 1937년부터 1945년까지 일본군과 싸운 중국 공산당의 주력 부대 중 하나입니다.


전투 경험이 풍부했던 북괴군 6사단을 김성은 중령이 지휘하던 김성은 부대가 막아서게 됩니다.


당시 대한민국 해병대는 아시아 최초의 정식 해병대로 미국 해병대가 그 수준을 보고 감탄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김성은 부대는 진동리에서 북괴군 6사단 정찰대대에 기습 공격을 감행하며,


171명의 적군을 사살, 포로 8명, 무기 110정을 노획하는 전과를 거두며 승리합니다.



영천 전투



출처 : flickr



1950년 9월 북한군은 낙동강 방어선을 뚫기 위한 총공세를 펼치게 됩니다.


9월 2일 북한군 15사단 주력이 영천으로, 12사단과 5사단은 포항과 안강으로 총 공격을 펼치게 됩니다.


영천은 지리적으로도 매우 중요했으며 대구, 포항으로 진격할 수 있는 교두보였습니다.


또한 당시 영천에는 유엔 지상군 총사령부와 대한민국 육군 본부, 미 8군 사령부가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영천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사령부는 부산으로 이동합니다.



영천은 전쟁의 사활이 걸린 곳이었습니다.


우리 국군의 병력과 무기가 바닥을 드러내기 시작했고 치열한 혈전 속에 북한군에게 영천을 빼앗기게 됩니다.


일개 중대가 20여 명 남은 우리 국군은 배식이 와도 먹을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위기에 몰려 있었습니다.


영천을 재탈환하기 위해 화력을 총동원하였으며 공중 폭격을 퍼부으며 다시 주도권을 잡아나가게 됩니다.


영천이 뚫리게 되면 낙동강 방어선이 무너지게 되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기에


대한민국 육군은 필사의 반격을 펼치게 됩니다.


마침내 북한군을 포위한 우리 국군은 북한군을 패주시키며, 사살 3,700명, 포로 200명의 큰 승리를 이루게 됩니다.



맥아더 장군은 인천상륙작전을 준비 중에 있었지만 영천이 뚫린다면 인천상륙작전도 불가능했습니다.


영천 함락 당시, 맥아더 사령부는 워커 장군을 통해 정일권 장군에게,


10만 명 규모의 망명정부를 준비하고, 가장 믿을 수 있는 최정예 2개 사단을 준비시키라고 전달합니다.


영천이 함락된다면 대한민국을 포기하고 망명 정부를 세울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 우리 군은 영천 전투의 승리로 대한민국을 지켜내며 북진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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