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응형


황건적의 난은 후한 말기에 황건적이 일으킨 반란입니다.



184년 후한 말기, 종교 집단인 태평도의 교주 장각을 중심으로 대규모의 봉기가 일어납니다.


후한 말기의 백성들은 환관과 외척의 전횡으로 인해 고통의 삶을 이어나갑니다.


장각은 태평도를 창시하고 스스로 대현양사라고 호를 지어 황천의 신의 사자라 일컫습니다.


▶ 한나라와 흉노 전쟁 확인하기





황건적의 봉기



출처 : wikipedia



장각은 병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치료한다는 명분을 내세워 포교를 시작합니다.


병을 치료하는 수단으로 주술을 사용했으며 부적이나 부적을 태운 물 등을 사용했습니다.


고통받고 있던 백성들에게 미신적인 민간 신앙은 안식처가 되었으며,


참위설과 음양오행설 등을 가미한 태평도의 교리와 행동은 단기간에 민중의 마음을 사로잡게 됩니다.


장각의 제자들은 전역으로 포교활동을 나서게 되고 수 십 만의 신도를 거느린 교단으로 성장합니다.



장각은 천공장군이라는 호를 지어 황건적 최고의 자리에 앉고,


동생 장보와 장량 역시 각각 지공장군과 인공장군으로 황건적을 지휘하게 됩니다.


일반 농민, 백성들은 점차 군사 조직의 성격을 띄게 됩니다.



후한 말기, 환관과 외척들의 전횡에 고통받던 백성들의 고통을 던다는 명분으로 봉기를 일으켰지만,


장각은 스스로 천자가 될 야망을 드러내며 역성혁명을 꿈꾸게 됩니다.



황건적의 난 



출처 : wikipedia



후한의 전국 13도에서 봉기가 일어납니다.


후한의 황제 영제는 외척이었던 장군 하진을 대장군에 임명하고 황건적 토벌을 명합니다.



후한은 진압군을 편성하게 되고 주준, 황보숭, 노식을 전투 부대로 편성합니다.


기도위에 임명된 조조 또한 황건적 토벌에 나서게 되고,


1,500명의 군사를 이끈 강동의 손견과 500명의 군사를 이끈 유주의 유비 역시 황건적 토벌에 나서게 됩니다.



 184년 유주성 전투

 184년 청주성 전투

 군대

 토벌군

 황건적

 군대

 토벌군

 황건적

 장수

 유언, 유비

 정원지, 등무

 장수

 유언, 유비, 공경

 황건적

 병력

 500명

 50,000명

 병력

 11,000명

 불확실

 결과

정원지와 등무가 관우와 장비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고 토벌군의 황건적 격퇴 

 결과

 황건적을 포위 섬멸한 토벌군의 승리

 184년 영천 전투

 184년 곡양 전투

 군대

 토벌군

 황건적

 군대

 토벌군

 황건적

 장수

 황보숭, 조조, 왕윤

 장량, 장보, 파재

 장수

 황보숭, 조조, 곽전

 장량

 병력

 불확실

 불확실

 병력

 불확실

 불확실

 결과

 황건적의 1만명 전사와 토벌군의 예주 평정

 결과

 장각의 병사로 동생 장량이 황건적을 
이끌지만 장량 전사

 184년 양성 전투

 184년 완성 전투

 군대

 토벌군

 황건적

 군대

 토벌군

 황건적

 장수

 유비, 주준

 장보, 고승, 엄정

 장수

 손견, 주준, 유비

 손중, 조홍, 한충

 병력

 500명

 90,000명

 병력

 5,000명

 90,000명

 결과

 황건적 내부 분열로
엄정이 장보를 살해 후 성문을 열며 투항 

 결과

 황건군 괴멸과 남양군 평정



황건적의 난 결과



완전히 소멸되지 않은 황건적은 188년 다시 중국 전역을 혼란으로 몰아넣습니다.


194년 황건적의 관해가 북해를 습격하기도 했지만 조조와 유비, 태사자에 의해 진압되며 황건적은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황건적의 난은 중국 각지의 군웅들이 할거할 수 있는 상황을 만들었으며 삼국지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입니다.



반응형
반응형


한 고조 유방의 유언에 따라 흉노와의 평화가 이어집니다.



왕소군의 역할도 매우 큰 요인이었습니다.


한나라 7대 황제인 무제가 등극하면서 흉노전쟁의 불씨가 살아납니다.


1차와 2차에 걸친 흉노 전쟁으로 흉노의 세력은 북쪽으로 밀려나며 그 세력이 쇠퇴하게 됩니다.


▶ 흉노와 묵돌선우 확인하기

▶ 왕소군 확인하기



한나라 7대 황제 무제, 1차 흉노전쟁





한 고조 유방의 흉노전쟁 실패 이후 한나라는 흉노에 조공을 바치며 화친 정책을 이어나갑니다.



기원전 141년한 무제는 흉노족과의 조약을 파기하고 전쟁에 돌입합니다.


1차 흉노전쟁의 승리에는 위청과 곽거병이 있었습니다.



위청은 한 무제의 누나 평양공주의 노비 출신으로 목동이었습니다.


기생 출신인 위청의 누이 위자부가 한무제의 후궁으로 발탁되어 궁으로 들어나고 나아가 황후로 등극되며,


위자부는 위청을 흉노전쟁을 지휘할 장군으로 천거게 됩니다.


노비 출신이지만 무예에 능하고 겸손했던 위청은 전쟁에서 공을 세우고 그 능력을 인정받습니다.


위청은 흉노 세력을 몰아내고 오르도스 지역을 회복하는 큰 전과를 올립니다.


마지막 흉노전쟁인 7번째 원정에서는 흉노의 선우와 치열한 격전을 벌이고 대승리를 거둡니다.



곽거병은 위청의 조카입니다.


1차 흉노전쟁 당시 총 7번의 흉노 정벌을 떠난 위청은,


전쟁 후반부 18세인 조카 곽거병을 출진시키고 곽거병은 천부적인 전투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곽거병의 능력을 알아본 한 무제는 곽거병을 장군으로 임명합니다.


위청의 원정 중 가장 큰 실패작이라 불리는 5차 원정부터 전쟁에 참여한 곽거병은 홀로 전과를 세웁니다.


한나라의 군대는 흉노족의 군대와의 싸움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했으며,


흉노족의 궁수기마부대를 당해낼 방도가 없었지만 몽골군의 전략과 기병 전술을 연구하고 습득한 곽거병은


유목민의 전략을 구현하며 기병을 이용해 적진을 돌파해 전과를 올립니다.


마지막 7차 원정에서는 기련산을 넘어 우루무치 일대까지 진출해 서쪽의 흉노를 섬멸하는 공을 세웁니다.





2차 흉노 전쟁





한 무제의 또 다른 부인이었던 이부인의 오빠 이광리가 장군으로 발탁됩니다.


한 무제는 이광리에게 흉노의 말보다 더 나은 말을 구해오라는 명령을 내리게 되고,


이광리는 서역의 대완국이 산지인, 피 같은 땀을 흘리며 천리를 달린다는 명마 한혈마를 찾습니다.



한혈마를 얻기 위해 이광리에게 약 7만의 군사를 주어 대완국을 정벌하게한 한무제는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출정합니다.


기원전 91년 2차 흉노 마지막 전투에서 이광리는 포로가 되어 흉노에 투항하고 처형당하게 됩니다.



흉노의 분열과 멸망



출처 : wikimedia


한때 광활한 영토를 다스리며 주변국들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흉노도 쇠퇴기에 접어듭니다.



한나라와의 거듭된 전쟁으로 흉노는 외몽골 북부까지 밀려나게 됩니다.


고비 사막을 사이에 두고 한나라와의 지리적 거리가 멀어진 흉노는 자연스레 약탈의 어려움으로 분열되고 소멸되게 됩니다.



또한 후한 말기에 남흉노는 대부분 남하하여 한족과 동화됩니다.



서쪽으로 이동한 흉노족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야기시켜 로마를 멸망하게 만든 훈족과의 연계성이 있는지는 아직 불분명하지만,


흉노의 이동과 실크로드의 건설은 동양과 서양의 역사를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됩니다.


▶ 로마와 카이사르 확인하기



훈족과 흉노족을 같다고 보는 견해도 있으며, 일부 흉노족이 훈족에 흡수되었다는 견해도 있습니다.



반응형
반응형


묵돌선우의 등장은 흉노를 최강의 유목민족국가로 발돋움 시킵니다.



묵돌선우는 유목민족을 규합하기 위해 유목민족의 세력을 조직화시키고,


십진법 단위로 군사를 조직하며 일종의 봉건제처럼 작위를 주어 결속력을 다집니다.



묵돌선우의 흉노족의 가장 큰 장점은 소수의 정예 기병을 특화시키고,


소규모 부대별로 기동전을 펼쳐 적을 유인하여 주력부대가 포위한 후 섬멸하는 전법입니다.



흉노의 궁수 기병은 한나라의 기병과는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의 막강한 공격력을 지녔습니다.



한나라 기병 100기를 흉노 기병 3기가 막아냈을 정도로 그 차이가 컸습니다.


▶ 흉노와 묵돌선우 확인하기





한 고조 유방의 흉노 정벌 실패





한나라와 초나라의 내전에서 승리한 한 고조 유방은 세력이 커진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전쟁에 나섭니다.


기원전 200년 흉노는 마읍성을 공격하고 태원으로 진격하여 진양까지 나아가게 됩니다.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출진한 한군이 도착하였으나 눈과 추위로 인해 더 이상의 진격이 불가능했습니다.


묵돌은 한나라 군을 유인하기 위해 거짓으로 물러났고 백등산으로 한나라군을 유인합니다.



현재의 산서성 일대인 당시 흉노족의 영토 평성에서 흉노족에 포위 되어 백등산에 7일간 고립된 유방은,


묵돌선우의 왕비에게 뇌물과 편지를 보내 가까스로 백등산을 탈출하게 됩니다.



이후 전한은 흉노와 굴욕적인 화친을 맺고 형제 관계가 되었으며 전한은 흉노를 형으로 대우하게 됩니다.


흉노와 전한은 왕위의 변동이 있을때마다 혼인으로 동맹을 갱신하였는데 한나라의 조공액은 매년 늘어갔습니다. 



한 고조 유방은 흉노와 전쟁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중국 4대 미녀, 왕소군





왕소군은 본래 한나라 원제의 궁녀였습니다.


왕소군은 서시, 초선, 양귀비와 함께 중국 4대 미인에 꼽히는 뛰어난 미모의 소유자였습니다.



원제는 수 많은 궁녀의 초상화를 그려 화첩으로 만들었는데 


당시 화첩을 그린 화공에게 잘보이려는 궁녀들은 뇌물로 화공을 꾀어 자신의 초상화를 잘 그려달라는 부탁을 했습니다.


왕소군은 화공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고 화공은 이에 화가나 왕소군을 가장 보기 흉하게 그려놓습니다.



흉노의 호한야 선우가 한나라를 친선차 방문하였고 우호의 증표로 궁녀 한 명을 요구합니다. 


원제는 화폭에서 가장 흉하게 그려진 왕소군을 선택하고, 


실제로 확인한 왕소군의 미모에 놀랐지만 원제는 어쩔 수 없이 왕소군을 호한야 선우에게 보냅니다.  


화공은 바로 처형당합니다.



왕소군은 흉노 백성들에게 농업 기술, 옷 짜는 법 등을 가르치며 흉노 백성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으며,


호한야 선우의 장남을 낳았고 그녀의 나이 72세에 병을 얻어 돌무덤에 안장됩니다.



왕소군과의 결혼 동맹으로 흉노와 한나라 사이에는 약 60년간 평화가 지속됩니다.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