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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태어나면서 가장 먼저 발달하는 감각은 촉각이라고 합니다.



아기들은 부모의 따뜻한 손과 접촉하면서 편안함을 느낀다고 합니다.


아기 마사지, 베이비 마사지는 부모와 아기의 유대 관계를 친밀하게 형성시키며


아기와 대화를 하면서 아기에게 신뢰와 안정을 느끼게 해줍니다.


부모의 차분한 손길은 아이에게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습니다.



아기 마사지, 베이비 마사지의 효과





아기 마사지는 아기의 소화를 도와주며 성장을 촉진시킨다고 합니다.


또한 근육의 발달을 도와주며 잠을 잘 잘 수 있도록 수면을 유도한다고 합니다.


가스를 배출시키고 복통이나 변비를 완화시키며 이빨의 성장을 촉진한다고 합니다.


조산아의 성장을 촉진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아기 마사지는 언제 시작할까?





베이비 마사지는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합니다.


많은 부모들은 자신의 아기들과 살을 맞대고 가슴에 안는 것을 가장 선호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방법은 캥거루 케어라고 불리는데,


아기를 가슴에 최대한 밀착시켜 끌어안으면서 아기의 등과 다리를 쓰다듬어 줍니다.



다만, 아기 마사지를 할 때에는 아기의 기분과 몸 상태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아기의 머리가 부모에게서 멀어지거나 팔을 곧게 펴고 뻣뻣하게 유지한다면 마사지를 하기에 좋은 타이밍은 아닙니다. 


수유한 후 45분 정도가 지나 마사지할 것을 권장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아기가 구토를 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자주 아기 마사지를 해야하는가?



아기 마사지를 얼마나 자주 해야하는지에 대한 해답은 없습니다.


어떤 부모는 매일하기도 하고 어떤 부모는 이삼일에 한번씩 하기도 합니다.


아침에 마사지를 하여 아기의 신체 리듬을 활발하게 만들어주기도 하고,


잠을 자기 전에 마사지를 하여 아기의 숙면을 도와주기도 합니다.


아기의 컨디션을 잘 파악하고 아기의 반응을 관찰하여 최적의 마사지 타임을 찾으면 됩니다.



아기 마사지 기술









다리와 발 마사지


아기의 발 뒤꿈치를 한 손으로 잡고 다른 한 손으로 허벅지부터 발목까지 부드럽게 주물러 줍니다.


엄지 손가락으로 발바닥을 문지르고 쓸어줍니다.



머리 마사지


손끝을 사용하여 부드럽고 약하게 작은 원을 머리에 그려줍니다.


양손으로 머리의 양쪽을 가볍게 문질러줍니다.



얼굴 마사지


아기의 이마에 손을 대고 이마 중앙에서 바깥쪽으로 부드럽게 밀어줍니다.


엄지 손가락을 사용하여 한쪽뺨에서 윗입술을 지나 다른 뺨으로 쓰다듬으며 아기의 얼굴에 웃는 얼굴을 그려줍니다.



가슴 마사지


아기의 가슴을 책을 접는 듯이 가볍게 접어 한쪽으로 밀고 다른쪽으로 밀고를 반복합니다.



배 마사지


손끝으로 아기의 배꼽 아래에 타원을 그립니다.


자연스럽게 소화 경로를 따라 시계 방향으로 문질러줍니다.



등 마사지


등을 좌우로 상하로 문질러주고 쓰다듬어 줍니다.  




베이비 마사지 오일 확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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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세기 중엽, 몽골족이 역사에 등장하게 됩니다.



유럽에서는 바이킹이 등장하는 시기와 비슷합니다.


중국과 중앙아시아 그리고 나아가 동유럽에 이르는 넓은 영토를 차지하고 정복한 몽골족, 


그리고 모래알처럼 흩어져 있던 몽골족을 통일한 칭기즈칸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 바이킹 확인하기

▶ 바이킹 시대와 전투 확인하기





몽골족



출처 : wikipedia



몽골족은 흑룡강 (아무르강, 헤이룽강) 중상류 유역에서 목축과 수렵을 하던 민족입니다.


11세기에서 12세기 전후 몽골 고원으로 유입되었으며,


몽골의 어원은 몽고르어로 영원한 불이라는 뜻에서 유래했다고 합니다.


몽골족은 푸른 늑대와 흰 사슴의 후예라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습니다.


몽골 비사에는 푸른 늑대와 흰 사슴이라는 이름이 붙여진 부부가 낳은 아들이 몽골족의 시초가 되었다고 전해집니다.



현재의 몽골족은 몽골인을 지칭하며 몽골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일컫습니다.


몽골러시아, 중국 자치구인 내몽골 자치구에 거주하는 몽골인도 약 200만명 가량으로 추정됩니다.


동아시아 북부를 점령했던 흉노 튀르크족의 후예라고 추정되는데,


동아시아를 점령한 튀르크족이 오늘날의 몽골 영토로 이동하면서 몽골족이 되었다고 합니다.


▶ 흉노 전쟁 확인하기

▶ 몽골 화폐와 환율 확인하기

▶ 러시아 화폐와 환율 확인하기



12세기의 몽골 상황





중국은 12세기 당시 여진족이 세운 금나라가 성장하면서 남송이 양쯔강 이남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같은 유목민이지만 여진족은 몽골족을 핍박하며 학살을 자행하는 등의 만행을 저지릅니다.



몽골 내부에서는 부족간의 약탈과 세력 싸움이 빈번히 일어났으며, 특히 척박한 겨울에는 약탈이 더 잦아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으로 인해 부족간의 연맹이 매우 중요했으며 서로 얽힌 이해 관계에 따라 보복전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유목 민족은 더 강한 부족과의 연맹이 필수였으며 이른바 전형적인 육강식의 세계였습니다.


연합과의 배신도 자주 일어났으며 이로 인해 부족간의 단합이 이루어질 수 없는 환경이었습니다.



금나라는 이러한 몽골의 상황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를 잘 이용하여 단합을 막고 분열을 조장하는 계략을 펼칩니다.



12세기 몽골족은 케레이트 부족, 메르키트 부족, 타타르 부족, 나이만 부족 등과 함께 몽골 고원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이밖에도 약 50여개의 크고 작은 부족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칭기즈칸의 등장





칭기즈칸의 등장은 몽골과 중국 그리고 세계 역사를 뒤흔들어 놓습니다.


혼란했던 몽골족을 통합하고 정복 전쟁을 이어나가기까지 칭기즈칸의 업적은 실로 경이롭기까지 합니다.


칭기즈칸의 리더쉽과 인재 등용, 개방적인 정책 등은 현재에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불행했던 어린 시절을 거쳐 정복 군주가 되기까지의 일대기는 현대인에게 큰 귀감을 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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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릉 대전은 관도 대전, 적벽 대전과 함께 삼국지 3대 전투 중 하나로 꼽힙니다.



촉나라와 오나라의 국가 운명을 건 중요한 전투 중 하나입니다.


주유가 사망한 뒤, 육손이라는 걸출한 인물의 등장은 오나라의 정세를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릉 대전은 유비가 의형제인 관우와 장비 그리고 수 많은 장군들을 잃는,


촉나라의 전력이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 삼국지 3대 전투 적벽 대전 확인하기

▶ 삼국지 3대 전투 관도 대전 확인하기





관우와 장비의 죽음



출처 : wikipedia



적벽 대전으로 제갈량의 천하 삼분 지계가 완성되며 촉은 위나라 공격을 감행합니다.


219년 유비가 한중을 공격하기 위해 출정하자 형주에 있던 관우 역시 북상하여 위를 공격합니다.


관우는 위나라와의 전투에서 승리하며 다수의 포로를 잡고 있었는데,


이들의 식량이 부족하자 오나라의 영지인 상관에서 군량을 노략질하게 됩니다.



오나라는 이에 매우 분노하여 위나라와 손을 잡게 되고 관우가 총 병력을 모아 위나라와 전투를 벌이는 사이,


오나라는 비어 있는 형주를 공격하여 차지하게 됩니다.


관우는 오나라군에 잡혀 손권에게 처형당하게 됩니다.



관우의 죽음은 유비와 장비에게 큰 충격을 주게 됩니다.


제갈량과 조운 등 많은 장군들과 신하들은 관우의 죽음에 대한 보복 공격을 하는 것에 반대합니다.


하지만 유비는 장비와의 회담 후 오나라를 직접 공격할 것을 결심합니다.



매일 술을 마시며 부하들을 혹독하게 훈련시키던 장비는 부하 장달과 범강에게 살해당합니다.



유비는 의형제이자 촉나라의 가장 강력했던 장군 관우와 장비를 잃은 채 이릉 대전을 시작하게 됩니다.



이릉 대전



출처 : wikipedia



유비는 형주로 진격해 무성과 자성을 함락시킵니다.


유비는 자귀에 본영을 설치하고 수군으로 하여금 이릉으로 출격하게 합니다.


육손이 촉의 수군을 상대하는 동안 유비는 육지로 진격할 계획이었으나 육손은 이를 간파하고 있었습니다.



오나라는 촉군이 수륙 병진으로 진격해 동시에 공격할 것을 두려워했지만,


촉은 수륙 병진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유비가 수군 대장인 황개를 신뢰하지 못하였다는 의견도 있습니다.


유비는 오나라를 압박하며 강릉으로부터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 진격하게 됩니다.



하지만 유비의 진영과 계략을 모두 파악한 육손은 화공으로 촉군을 공격합니다.


순식간에 촉군은 진영이 무너졌으며 각개격파를 당하며 퇴각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유비는 백제성까지 후퇴하였으며 백제성에서 사망하게 됩니다.



이릉 대전 이후



이릉 전투에서 패한 촉나라는 이후 더이상 형주로 진출하지 못합니다.


유비는 백제성에서 사망하며 2대 황제로 유선이 오르게 됩니다.



이릉 대전 전으로 관우와 장비를 잃었으며,


이릉 대전 중 마량, 왕보, 장남, 풍습, 부동 등 촉나라의 유능한 문관과 무관을 상당히 많이 잃게 됩니다.



제갈량과 강유의 북벌이 개시 된 후 촉나라는 이릉 대전에서 잃은 유능한 장수들의 부재로


북벌은 실패하게 되고 결국 위나라가 천하를 통일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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