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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참전으로 신교는 구교에게 승리를 쟁취하게 됩니다.



스웨덴의 구스타프는 군사 개혁을 통해 신교 군대를 막강하게 재정비합니다.


신교군에게 처음으로 패배한 구교는 발렌슈타인을 다시 불러들이게 됩니다.


신교의 구스타프와 구교의 발렌슈타인이 전장에서 만나게 됩니다.


▶ 발렌슈타인 확인하기

▶ 브라이턴펠트 전투 확인하기

▶ 스웨덴 환율과 화폐 알아보기



브라이턴펠트 전투 이후 스웨덴 구스타프의 상황



브라이턴펠트 전투에서 구교의 틸리를 격파한 신교의 구스타프는 신교에게 첫 승리를 안겨주었지만,


본인의 영지가 아닌 독일의 땅에서 원정 전투를 하고 있다는 한계로 인해 더 이상 진격을 하지 못합니다.


또한 신교 작센의 게오르크가 브라이턴펠트 전투에서 구스타프를 지원하지 않은채,


전투에서 도망친 이력으로 게오르크에게 믿음이 사라진 것도 진격을 멈춘 이유 중 하나였습니다.



구교인 프랑스의 지원을 받고 있었지만 강력한 스웨덴 군대를 확인한 프랑스는


스웨덴이 유럽 본토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는 것을 견제하기 시작합니다.


구교와 신교의 대립과 연합, 음모와 계략 속에서 구스타프는 신교 연합을 결성하고,


독일 북부의 신교 동맹은 비교적 견고해지게 됩니다.





레흐강 전투



출처 : wikipedia



1632년 4월 신교인 구스타프의 군대와 구교인 틸리의 군대가 레흐강에서 결전을 벌이게 됩니다.


구교인 황제군의 명장 틸리는 수비하기 최적의 장소인 언덕 위에 진영을 꾸리고 방어선을 구축합니다.


이에 신교인 구스타프의 스웨덴 군은 경량포를 신속하게 전면 배치하며 구교를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신교의 군대는 틸리의 구교를 공격하기 위해서는 강을 건너 언덕으로 진격을 해야 했으며,


강을 건너야하는 절대적인 불리함 속에서 전투를 진행해야 했습니다.


강을 도하해야 하는 상황에 구스타프는 핀란드군 400명을 선발대로 보내 배를 이어 다리를 만들게 합니다.


핀란드군이 다리를 만드는 동안 스웨덴은 경량포로 다리 건너의 틸리군을 견제하였으며,


틸리군은 이를 효과적으로 저지하지 못한 채 스웨덴군이 강을 도하하는 것을 허용합니다.



구스타프의 신교 군대와 틸리의 구교 군대의 전투가 벌어지고,


전투 중 구교의 명장 틸리가 부상을 입으며 황제군은 퇴각하게 됩니다.


레흐강 전투는 스웨덴의 구스타프의 승리로 끝나게 되며 부상을 입은 틸리는 얼마 후 파상풍으로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발렌슈타인 황제군 총사령관 복귀와 뤼첸 전투의 시작



틸리를 잃은 황제군은 발렌슈타인을 황제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합니다.


총사령관이 된 발렌슈타인은 구교 세력의 지원을 받으며 병력을 모아 전투에 대비하게 됩니다.


구교의 저돌적인 장군인 파펜하임의 합류로 발렌슈타인은 큰 힘을 얻게 됩니다.


구교는 발렌슈타인과 파펜하임의 2만 6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으며, 


신교는 구스타프의 스웨덴군과 독일 북부의 군대 1만 8천 군대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전염병으로 군마의 70%를 잃은 구스타프는 결전을 미루고 후퇴를 했고,


후퇴 소식을 들은 파펜하임은 보급품 확보를 위해 라인 교구대에 5천의 기병대를 이끌고 출진하게 됩니다.


파펜하임의 5천의 기병대가 발렌슈타인군과 분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구스타프는 후퇴를 멈추고


발렌슈타인을 공격하기 위해 되돌아오게 되고 뤼첸 마을에서 30년 전쟁의 가장 큰 전투인 뤼첸 전투가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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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기가 손을 빠는 행동은 위험한 행동일까요?



아기는 태어나 자라면서 다양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생후 한 달 정도가 지나면 손을 입에 갖다 대는 행동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손가락이나 손 전체를 입 안에 넣기도 하고 빨기도 합니다.


이런 모습을 보고 부모들은 손을 빠는 행동이 위험한 행동인지 정상적인 행동인지 의아해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손을 빠는 행동은 유아에게 나타나는 매우 정상적이며 흔한 행동으로 아기의 즐거운 취미로 간주되기도 합니다.



아기가 손을 빠는 원인





1. 아기가 손을 빠는 행동을 하는 이유 중 하나는 배가 고프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모유나 분유를 먹어야 하는 식사 시간이 제 시간에 충족되지 않으면,


아기들은 손을 빠는 행동을 통해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은 배가 고픈 아기의 자연 반사 행동으로 복부의 포만감이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손을 빠는 행동은 아기가 더 성장을 하여도 습관으로 남아있을 수 있기 때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2. 아기는 외로움의 표현으로 손을 빨기도 합니다.


아기들은 사랑받고 싶어합니다.


하지만 부모가 바쁘거나 아기와의 시간을 충분히 가지지 않는다면, 아기는 손가락을 빠는 행동을 보일 수 있습니다.  


외로움을 느끼는 아기는 손을 빠는 행동을 통해 자신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인한다고 합니다.



3. 아기는 스트레스를 완화하기 위해 손을 빨기도 합니다.


아기를 꾸짖거나 아기에게 지나치게 큰 소리로 이야기를 할 때, 아기 앞에서 부모가 다툼을 벌일 때 등


아기들이 주변의 환경에 압박과 불안함을 느껴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손을 빠는 행동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아기들은 피곤하거나 배가 고프거나 지루하거나 불안하거나 하는 일상의 거의 모든 상황에서


손가락을 빠는 행동을 할 수 있으며 이러한 행동은 매우 자연스러운 행동이라고 합니다.





손가락 빠는 행동이 아기에게 미치는 영향





1. 손가락을 빠는 행동은 아기의 치아 형성에 해로운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아기가 손을 너무 자주 빨거나 세게 빨게 되면 치아가 손상될 수 있습니다.


치아가 돌출되거나 수축되어 건강한 치아 형성에 좋지 않은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2. 손가락을 빠는 행동은 아기의 손에 묻어 있던 세균이 아기의 몸 속으로 유입될 수 있습니다.


아기들은 주변의 모든 것을 잡거나 접촉하는 등의 행동을 보일 수 있습니다.


깨끗하지 않은 물건과의 접촉은 세균이나 박테리아를 아기의 손에 노출시키게 되며,


세균이나 박테리아가 손과 입을 통해 아기의 위로 들어간다면 아기의 건강과 소화시스템에 문제를 일으킬 수 있습니다.



3. 손이 붓거나 변형될 수 있습니다.


아기가 손을 지속적으로 빤다면 피부가 벗겨지고 손이 부어 변형될 수 있다고 합니다.



4. 아기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형성시킬 수 있습니다.


아기가 손을 빠는 원인 중에는 스트레스와 불안함, 외로움이 작용할 수 있습니다.


아기가 지속적으로 손을 빤다면 아기의 정서가 불안하다는 증거이며 이는 아기에게 부정적인 감정을 유발시킬 수 있습니다.



아기가 손을 빨지 않게 하는 방법



1. 아기의 식사 시간을 잘 맞춰야 합니다.


2. 아기와 친밀감을 형성하며 끊임없는 유대감을 형성하여 불안하지 않게 합니다.


3. 부드러운 음악을 듣게 하고 아기 마사지를 통해 아기를 편안하게 해줍니다.


4. 아기에게 손장갑을 착용시킬 수 있습니다.


5. 아기 앞에서 싸우지 않고 지나치게 큰 소리를 지르지 않아야 합니다.


▶ 아기 마사지 확인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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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교와 신교의 전쟁에서 신교는 구교에게 밀리며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거듭되는 구교의 승리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페르디난트에게 힘을 실어주게 되었으며


페르디난트는 발렌슈타인의 군대와 자금을 바탕으로 세력을 확장하려 합니다.


프랑스의 슐리외 추기경은 페르디난트와 발렌슈타인을 분열하게 만들었으며


발렌슈타인은 해임된 채 전선에서 이탈하게 됩니다.


이때 신교의 위기를 타파할 스웨덴의 구스타프가 등장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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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의 참전



1630년 스웨덴은 1만 3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독일 베를린의 우제돔에 상륙하게 됩니다.


스웨덴의 구스타프는 해안에 상륙하여 해안 근처의 황제군을 몰아내며 거점 확보에 힘을 씁니다.


하지만 신교인 개신교들은 단합이 잘 되지 않았으며 스웨덴군이 상륙했음에도 중립을 표방합니다.



개신교 루터파의 최대 세력인 작센 선제후 요한 게오르크와 캘빈파였던 게오르크 빌헬름이 신교 연합에 가담합니다.


또한 구교였던 프랑스가 스웨덴에 5년간 군자금 지원을 약속하며 스웨덴은 힘을 얻게 됩니다.





마그데부르크



마그데부르크는 작센을 지나기 위한 주요 관문으로 황제군이 주둔하는 지역 근방이었습니다.


스웨덴의 구스타프는 마그데부르크를 점령하기 위해 사전에 신교도 봉기를 일으키며 준비를 했지만,


돌연 마그데부르크 점령을 포기합니다.


황제군의 명장 틸리의 부하인 파펜하임이 마그데부르크로 입성하게 되며 대약탈이 시작됩니다.


상업도시이자 공업도시였던 마그데부르크를 황제군의 거점으로 삼으려했던 틸리의 계획은 어긋나게 되며,


마그데부르크에서의 구교의 약탈은, 중립을 표방하던 신교 세력을 구스타프의 편에 서게 하는 계기가 됩니다.



라이프치히 탈환 작전, 브라이턴펠트 전투



출처 : wikipedia



파펜하임은 메르세부르크와 라이프치히를 차례로 점령하는 과정에 폭압적인 방법을 사용합니다.


이에 작센의 게오르크는 신교인 스웨덴의 편에 서게 됩니다.



라이프치히를 점령한 틸리의 군대와 라이프치히를 탈환하려는 구스타프와 작센 연합군은


라이프치히 북방 6km 떨어진 브라이턴 펠트에서 대치하게 됩니다.


신교 연합군은 2만 4천의 스웨덴군과 1만 8천의 작센군으로 구성되었으며 구교인 틸리군은 약 3만 5천의 병사가 있었습니다.



전투가 시작되자 틸리는 전통적인 테르시오 대형으로 진격하고 이에 놀란 작센군은 도망칩니다.


전투 경험이 많던 스웨덴군은 소형화 된 대포를 이용하여 테르시오 대형에 집중 포격을 가합니다.


또한 3열이 동시에 사격하는 전술을 사용하며 틸리군을 압박하기 시작합니다.



틸리의 군대는 스웨덴 군대의 공격에 와해되기 시작하고, 신교가 구교를 이기는 첫 전투로 막이 내립니다.


황제군의 피해는 막대했으며 군대의 80%가 사망하거나 포로가 됩니다.


틸리와 파펜하임 역기 부상을 당하게 됩니다.


스웨덴의 구스타프는 작센의 게오르크를 절대 믿지 않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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