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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차 로도스 공방전은 오스만 제국의 승리로 끝이 납니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 슐레이만 1세는 로도스섬을 점령하면서 지중해로 뻗어나갈 수 있는


해양 거점을 마련하는 중요한 업적을 달성하게 됩니다.


1522년 자신들의 본거지인 로도스섬을 오스만 제국에게 빼앗긴 로도스 기사단은,


1523년부터 1530년까지 유럽 여러 지역을 떠도는 떠돌이 신세로 전락합니다.


▶ 로도스 공방전 확인하기

▶ 카르타고 확인하기

 


기사단의 몰타 정착



1530년 신성 로마 제국의 카를 5세 황제는 기사단에게 몰타 영지를 수여합니다.


몰타는 이탈리아의 남부 시칠리아 남쪽에 자리한 섬이었습니다.


몰타는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척박한 환경의 땅을 가지고 있었으며,


카를 5세 황제는 스페인 왕국의 국왕이기도 하였는데 기사단을 몰타에 정착하게 한 데에는 다른 의도가 있었습니다.



몰타는 위치상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지중해의 가운데 자리하고 있어


무역의 거점인 동시에 유럽과 소아시아 아프리카를 잇는 주요 길목이었습니다.


기사단은 몰타섬을 수여 받는 조건으로 매년 매 1마리를 시칠리아 부왕에게 바치고,


북아프리카 연안에 위치한 스페인령을 방어해야 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상황



출처 : wikipedia



당시 북아프리카는 오스만 제국의 슐레이만 1세의 영향하에 있었습니다.


팽창을 거듭하던 오스만 제국은 이집트와 알제리까지 진출하며 아프리카에서의 영향력을 키워가고 있었습니다.  



몰타섬은 동지중해에서 서지중해로 넘어오는 길목에 자리하고 있었으며,


주요 무역 거점인 시칠리아, 밀라노, 나폴리로 가기 위한 거점지였습니다.


옛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영토를 점령한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로 나가기 위해 몰타를 수중에 넣어야 했습니다.


육지와 바다에서 신성로마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전쟁은 피할 수 없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당시 프랑스와 동맹을 맺고 있었는데, 당시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카를 5세에게 밀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될 수 없었으며, 이로 인해 오스만 제국과 동맹을 맺습니다.


유럽은 구교와 신교의 대립으로 종교 개혁까지 일어나며 매우 혼란스러운 상황이 지속되었으며,


이러한 상황은 슐레이만 1세로 하여금 세계 군주의 꿈을 꾸게 합니다.



몰타 공방전



출처 : wikipedia



복잡한 상황속에 몰타는 유럽에게는 오스만 제국의 지중해 진출을 막아야 하는 최전선의 방어선이 됩니다.


로도스섬에서의 패배를 다시 겪지 않기 위해 몰타 기사단은 철옹성의 요새를 다시금 구축합니다.


로도스 공방전 당시 전투에 참여 했던 라발렛이 몰타 기사단의 단장이 됩니다.


오스만 제국은 기병 6천, 예니체리 7천을 포함한 총 3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몰타로 진격합니다.


이미 오스만 제국과의 전투 경험이 있던 라발렛은 성벽 보완, 민가 철거 등 완벽한 대비를 하고 있었으며


몰타가 함락된다면 유럽 전체가 위험한 상황임을 알고 있던 유럽의 각 국가들은 지원병을 보내기 시작합니다.



오스만 제국의 몰타섬 포위 공격은 성 엘모에서 시작되며, 이것은 전쟁에서 패하는 큰 원인이 됩니다.


오스만은 몰타섬의 주요 요새인 성 안젤로와 성 미카엘을 놔두고 외곽 요새인 성 엘모를 우선 공격했으며


이곳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에 유럽 지원군이 몰타로 도착하게 됩니다.


또한 오스만의 명장 투르구트가 뒤늦게 도착하여 지원에 나섰지만 성 엘모에서 전사하게 됩니다.



오스만은 성 엘모를 힘겹게 점령하고 본 요새인 성 미카엘로 돌진했지만,


스페인 구원군의 도착과 몰타 기사단의 활약으로 오스만군은 거의 전멸하게 됩니다.



몰타 점령에 실패한 오스만 제국은 퇴각할 수 밖에 없었으며 지중해 패권이 약화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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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은 세력을 넓혀나가며 성장을 지속합니다.



지중해로 뻗어나가던 오스만 제국은 로도스 섬을 점령해야만 했습니다.


천 년의 제국 비잔티움의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메메드 2세는,


로도스 섬으로 진격했지만 기사단에 막혀 로도스 섬 점령을 포기합니다.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슐레이만 1세가 술탄이 되며, 


오스만 제국은 로도스 섬 제 2차 공략을 준비하게 됩니다.


▶ 1차 로도스 공방전 확인하기

▶ 메메드 2세 확인하기

▶ 그리스의 불 확인하기

▶ 흉노 전쟁 확인하기

▶ 몽골군의 이슬람 정복 확인하기

▶ 칭기즈칸 확인하기


로도스 섬 1차 공격



출처 : wikipedia



300척의 전함과 오스만 제국의 최정예 부대 예니체리를 앞세운 레이만 대제는 로도스 공격을 시작합니다.


로도스 성안의 기사단 역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었으며, 기사단의 포와 그리스의 불이 오스만군의 공격을 막아냅니다.



기사단의 포는 이탈리아 출신의 공학자 겸 대포 전문가에 의해 제작되었는데,


각도와 거리를 계산하여 정확한 조준 포격이 가능한 대포였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군사들은 대포 저격을 받으며 많은 지휘관들이 전사하게 됩니다.



달 간의 전투에서 기사단의 피해는 기사 2명 사망이었지만, 


오스만 군대는 그 피해 규모를 짐작하기 어려웠을 정도로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됩니다. 





로도스 섬 2차 공격



다국적 기사단으로 구성된 로도스 기사단은 그 출신에 따라 지역을 나누어 수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오스만 군은 이에 따라 군대를 나누어 분산 공격을 시도하게 됩니다.



로도스 성의 남쪽 지역은 영국 기사단이 방어를 하고 있었으며 비교적 지형이 평탄하여 공격하기 좋은 위치였습니다.


이곳에서 2차 로도스 공방전 최대 격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영국군 요새를 공격하던 수 천명의 오스만군이 사망하고, 추가 공격에서 오스만군 1만 5천명이 사망하게 됩니다.


오스만군의 총 공세는 이어졌으며 성벽이 균열되고 그 사이로 오스만군이 침투하게 됩니다.


기사단은 200명의 기사를 잃는 큰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후로도 수 차례의 전투가 벌어지지만 화약이 떨어진 기사단은 결국 항복하게 됩니다.



슐레이만 대제의 로도스 섬 공방전은 오스만 제국의 승리로 마무리가 됩니다.



쉴레이만 대제



출처 : wikipedia



쉴레이만 대제는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으며 최고의 정복 군주입니다.


슐레이만 대제는 오늘날의 이집트, 튀니지, 알제리, 발칸 반도 등의 오스만 제국 최대의 영토를 구축합니다.



슐레이만 대제의 어머니는 크림반도 지역의 크리미아 지방 왕족 출신으로,


몽골 제국 칭기즈칸의 큰아들 주치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로 인해 터키는 오늘날 터키의 역사가 유목 민족인 흉노족, 몽골족부터 내려오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다민족 국가였으며 개방적 정책을 펼쳤으며 슐레이만 대제 역시 다양한 교육을 학합니다.


전쟁에서 큰 공로를 세웠을 뿐 아니라 국가 통치에도 뛰어났습니다.


오스만 제국 역사상 최대의 법전인 군하총회를 집필했으며,


예술적인 감각도 뛰어나 다양한 분야의 예술을 후원했으며 많은 모스크를 건설합니다.



슐레이만의 13번째 원정이자 마지막 원정인 헝가리 원정에서 건강이 크게 악화되어 최후를 맞이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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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년 동안 무너지지 않았던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합니다.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 제국은 지중해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를 합니다.


동서 무역의 중심지 지중해의 패권을 두고,


오스만 제국과 유럽 기사단의 치열한 해전이 로도스에서 벌어지게 됩니다.


▶ 콘스탄티노플 함락 확인하기

▶ 메메드 2세 확인하기

▶ 십자군 전쟁 확인하기



오스만 제국의 상황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 제국의 메메드 2세는 지중해를 장악하기 위해 지중해로 향합니다.


당시 베네치아는 해상 왕국으로 지중해 무역을 독점하고 있었습니다.


오스만 제국은 베네치아와의 견제와 유럽 기사단의 견제를 받으며 유럽 세계를 불안함에 떨게합니다.



소아시아의 연안에 가까이 위치한 로도스 섬은 무역의 중심지로,


이집트와 레바논으로 연결되는 레반트 지역과 유럽, 소아시아를 잇는 길목의 거점지였습니다.


그리스와 로도스섬, 크레타섬을 잇는 항로는 페르시아 시절부터 중요한 항로였으며,


바다를 장악하려는 오스만 제국에게는 로도스 섬을 반드시 차지해야만 했습니다.





로도스 섬과 주변의 상황



당시 로도스는 십자군 전쟁으로 유럽에서 소아시아로 이동한 기사단이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로도스 섬에 견고한 성을 구축하고 오스만 배를 비롯한 상단의 배들을 해적질을 하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기사단의 해적은 케르베로스라 불릴 정도로 잔인하고 악랄했으며,


케르베로스는 그리스 신화 속 지옥의 파수꾼인 머리 세 개 달린 짐승입니다.



로도스 섬과 크레타 섬, 그리스를 잇는 항로와 주변은 해적으로 가득했으며,


서로의 배를 약탈하고 노략질하는 상황이 비일비재하고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로도스 1차 침공



출처 : wikipedia



1480년 오스만 제국은 160척의 전함을 출동시키면서 로도스 1차 침공이 시작됩니다.


콘스탄티노플 함락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청동 대포를 위주로,


오스만 제국은 포 진지를 구축하고 엄청난 포격을 가하기 시작합니다.


1차 공격의 목표는 성 니콜라스 탑으로 육지와 해상 동시에 공격을 펼치지만 로도스 성은 공격을 막아냅니다.



천 년을 이어온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메메드 2세였지만,


철옹성과 같은 로도스 성의 1차 공격 실패후 메메드 2세는 다시는 로도스 침공을 하지 않습니다.  


메메드 2세의 생전에 로도스 성을 다시 침략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습니다.


메메드 사후 뒤를 이은 오스만 제국의 두 명의 술탄 역시 로도스 성은 침략하지 않습니다.



술레이만 1세의 등장



출처 : wikipedia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를 이끈 술레이만 대제가 등장합니다.


오스만 제국의 10대 술탄으로 등장한 술레이만 1세는 군사전략가로서의 능력이 뛰어났으며


46년동안 13차례의 대외 원정을 나가는 수 많은 군사적 업적을 쌓습니다.



술레이만의 첫 번째 목표는 메메드 2세도 포기했던 로도스 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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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트 타일러의 난은 잉글랜드를 혼란으로 빠뜨립니다.



그 사이 프랑스는 잉글랜드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회복하며 전세 역전에 성공합니다.


오랫동안 중단되었던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백년 전쟁은,


1415년 잉글랜드의 왕 헨리 5세의 도발로 다시 불이 붙기 시작합니다.


▶ 크레시 전투 확인하기

▶ 와트 타일러의 난 확인하기



잉글랜드 왕 헨리 5세, 아쟁쿠르 전투



출처 : wikipedia



헨리 5세는 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빼앗긴 노르망디 영지를 탈환을 준비합니다.


1415년 프랑스의 북부 아쟁쿠에서 백년 전쟁 역사상 가장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게 됩니다.



흑사병이 창궐하고 농민 반란이 일어난 잉글랜드의 상황을 침착하게 수습한 헨리 5세는


궁수와 보병 8천, 중기병 2천의 총 1만명의 군대를 소집합니다.


노르망디에 상륙한 헨리 5세는 하르플루를 함락시키지만 전염병으로 병력의 30%를 잃게 됩니다.


칼레로 진격하던 헨리 5세와 이 소식을 들은 프랑스군은 아쟁쿠르에서 만나게 됩니다.



크레시 전투에서의 패배의 원인을 잊은 프랑스군은 또다시 제노바 석궁병을 우선 배치하게 되고,


제노바 석궁병에게 필수인 파비스 방패가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전쟁에 임한 제노바 석궁병은 


잉글랜드 롱보우 전문 부대인 요먼에게 사거리에서 절대적으로 밀리며 궤멸을 당하게 됩니다.


프랑스군은 후퇴하는 제노바 석궁병을 잡아 처형하며 기사 돌격을 지시합니다.


원거리에서 궁병이 공격하고 근거리에서 보병이 공격하는 협동 전술에 능한 잉글랜드군은


프랑스군을 완전히 압도하며 프랑스군을 궤멸시킵니다.



프랑스군은 불과 몇 년전의 실수를 반복하며 대패를 합니다.





프랑스의 위기



아쟁쿠르 전투의 패배는 프랑스에게 큰 위기로 다가옵니다.


왕과 귀족의 분열은 항상 프랑스의 통합을 위협하고 있었으며 중앙집권화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원인이었습니다.


아쟁쿠르 전투의 패배로 왕과 귀족들의 갈등은 극에 달하고 있었으며 잉글랜드의 헨리 5세가 프랑스에 입성합니다.


프랑스의 절체절명의 상황에 잔 다르크가 등장합니다.



잔 다르크의 등장



출처 : wikipedia



프랑스 북동부에서 태어난 잔 다르크는 로마 카톨릭 교회의 성인으로 오를레앙의 성처녀라고도 불립니다.


잔 다르크는 프랑스를 구하라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아 백년 전쟁에 참여하게 됩니다.



샤를에게 군대를 요청한 잔 다르크는 소수의 군대를 이끌고 잉글랜드군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웁니다.


프랑스의 오를레앙을 구하며 프랑스의 영웅으로 떠오르게 됩니다.


여러 전투에서 활약하던 잔다르크는 부르고뉴군과 격전을 벌이다가 사로잡히게 됩니다.


잔다르크를 따르는 세력이 커짐에 위협을 느낀 프랑스 샤를은 잔다르크를 구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습니다.



영국에 넘겨진 잔다르크는 결국 화형을 당하게 됩니다.



백년 전쟁의 끝



잔 다르크의 활약으로 전세는 프랑스쪽으로 유리하게 굳어버립니다.


1450년 프랑스는 노르망디 전투에서 영국군을 격퇴하며 영국이 점령한 대부분의 프랑스 영토를 회복합니다.


1453년 프랑스군은 칼레마저 탈환하며 영국군을 본국으로 몰아내는데 성공합니다.



영국이 프랑스 영토에서 완전히 물러나며 백년 전쟁을 끝이 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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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글랜드는 크레시 전투에서 프랑스에 대승을 거둡니다.



크레시 전투의 승리로 그 기세를 이어 칼레까지 점령하는데 성공을 거둡니다.


조직력이 강하고 팀플레이에 능한 농민 평민들로 구성된 잉글랜드군은, 


프랑스의 최신 설비로 중무장한 기사단에 연전연승을 거둡니다.


▶ 크레시 전투 알아보기

▶ 백년 전쟁의 시작 알아보기



푸아티에 전투



출처 : wikipedia



크레시 전투와 칼레 전투 이후 잉글랜드와 프랑스의 년 전쟁잠시 중단됩니다.


전쟁으로 인한 양국의 재정 악화와 페스트의 유행이 그 원인이었습니다.



1355년 잉글랜드 에드워드 3세의 아들인 흑태자 에드워드가 남프랑스를 침입하며 프랑스 장 2세와 전투를 벌이게 됩니다.


흑태자는 크레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전술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프랑스 기사단의 말들이 집중적으로 롱보우의 공격을 받으며 기사단이 활약을 할 수 없게 만듭니다.


프랑스군은 말을 버리고 언덕에 진을 친 잉글랜드군을 향해 두 발로 전진하지만,


무거운 갑옷과 언덕길을 오르는 행군은 프랑스군을 지치게 만듭니다.


잉글랜드군의 롱보우는 푸아티에 전투에서도 큰 활약을 했으며 장 2세는 포로로 잡히게 됩니다.



푸아티에 전투의 패배는 프랑스에 큰 손실을 가져다 줍니다.


장 2세의 석방을 위해 프랑스는 나라 전체의 1년치 수익의 두 배인 300만 크라운을 준비해야 했으며,


프랑스로 돌아온 장 2세는 자신의 몸값을 다 지불할 수 없음에 다시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장 2세는 영국에서 사망합니다.





프랑스 샤를 5세 즉위



출처 : wikipedia



장 2세의 죽음으로 프랑스에서는 샤를 5세가 즉위합니다.


샤를 5세는 프랑스 내치에 주력하는 동시에 아키텐 귀족을 선동하여 영국에 반기를 들게 합니다.



잉글랜드의 흑태자 동생 존과 프랑스 샤를 5세의 전투가 시작됩니다.


프랑스 샤를 5세는 바다 건너 프랑스로 들어온 잉글랜드군을 격퇴하고,


카스티야 해군과 연합군을 결성하여 해전의 강자 영국해군을 격파합니다.


또한 영국군에게 빼앗겼던 프랑스의 영토를 되찾아오게 됩니다.



영국과 프랑스는 1375년 휴전 협정을 체결합니다.



잉글랜드 와트 타일러의 난



출처 : wikipedia



잉글랜드의 와트 타일러의 난은 농민의 대봉기 사건을 일컫습니다.


1340년대 페스트가 번지고 백년 전쟁으로 인해 과다한 세금이 농민들에게 부과되면서 원성이 높아져 갑니다.


1381년 잉글랜드 왕실의 관리인이었던 존 뱀프턴이 미납된 인두세를 걷으려 하면서 봉기가 시작됩니다.



농민 봉기는 전국적으로 급속하게 퍼졌으며 와트 타일러가 이끄는 봉기군이 런던으로 진격합니다.


당시 잉글랜드의 국왕이었던 리처드 2세는 농민들의 요구를 대부분 들어주기로 약속합니다.


리처드 2세와 타일러의 회담에서 리처드 2세의 수행원들이 타일러를 암살하며 농민군과의 약속을 철합니다.


반란군은 대부분 죽임을 당하면서 와트 타일러의 난은 끝나게 됩니다.



잉글랜드 와트 타일러의 난으로 잉글랜드 사회는 불안정했으며,


이를 틈타 프랑스는 잃었던 영토를 재탈환하며 전세를 역전시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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